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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ck Jun 02. 2023

재즈와 클래식 필라테스의 공통점

재즈를 제법 좋아하는 편이다. 개인적으로는 스윙이 넘치는 연주나, 자유롭지만 완벽한 호흡 속에서 나오는 비밥 연주를 즐겨 듣는 편이다. 스윙은 연주보다는 느낌, 비밥은 연주자들의 호흡에서 나오는 연주에 집중한다. 재즈의 묘미는 즉흥에서 나온다. 갑작스러운 생각이나, 여행을 갔을 때 갑자기 변경되는 일정에서 나오는 즐거움은 재즈에서 느끼는 즉흥 연주와 비슷하다. 잼(Jam)이라고 불리는 즉흥 연주에서 재즈 연주자들은 자신들이 실력을 뽐내고는 한다.


재즈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많은 사람들이 보컬 재즈를 말하는데 대표적으로 빌리 홀리데이, 엘라 피츠제럴드, 사라 본 혹은 노라 존스, 웅산 등이다.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재즈'는 허스키하면서도 끈적한 느낌을 떠올린다. 물론 보컬 재즈는 좋은 재즈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보컬 재즈는, 재즈가 줄 수 있는 일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클래식 필라테스와 재즈는 비슷한 점이 많다. 재즈가 즉흥 연주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엄연하게 악보가 있고 일정한 박자 속에서 연주가 진행된다. 그러면서 순간순간 애드립이 발생되고 그것을 받아내는 다른 연주자들의 또 다른 애드립이 모여 즉흥 연주의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것이다. 클래식 필라테스도 마찬가지다. 재즈의 악보처럼 반복된 일정한 패턴이 있지만 개인마다 다르다. 그리고 동일한 움직임 할지라도 개인마다 차이점이 나타나는 개별성이 있다. 리포머 위에서 동일한 패턴 속에서 자신만의 자유로움을 느끼며 움직인다. 마치 즉흥 연주를 하면서 자유로움을 느끼는 재즈 연주자들처럼 말이다. 



클래식 필라테스는 일상을 넘어 세상 모든 곳에 가치를 발현한다. 나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고 비집고 들어오는 스토커처럼 클래식 필라테스는 모든 것에 연관이 있고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명분이 있다.


예를 들면,


· 클래식 필라테스는 달리기에도 영향을 미친다. 오리지널 시스템의 움직임을 통해서 골반의 범위가 확장되고 부드러워진다면, 수직과 정면의 움직임 반복인 달리기의 능력은 매우 상승하게 된다.


· 척추가 부드러워지고 목의 정렬이 맞춰지면 이명이 사라지고 청각 능력은 좋아진다. 그렇게 되면 재즈 그리고 클래식 연주를 더욱 명확하게 들을 수 있게 된다.


· 신체 중심인 센터의 힘이 강력해져 허리가 무너져 내리지 않게 되면, 독서를 오랫동안 할 수 있는 지구력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이렇듯 클래식 필라테스는 세상 모든 것과 연관되어 있다.




기계음에 익숙한 세상에서 '재즈' 그 세계 한물 간 그들의 자유로운 연주는, 세상 사람들에게 지루한 음악으로 인식되고 있다. 사실 '지루함'이라는 감정도 없을 정도로 그들의 연주는 많은 사람들에게 잊혔다. 지금은 한물 간 조셉 필라테스의 '컨트롤로지'처럼 일정한 형식 속의 자유로운 움직임, 즉 오리지널 시스템도 많은 사람들에게 잊혔거나 혹은 알지 못하는 세상이다. 


영화 라라랜드의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은 한물 간 재즈를 진지하게 임하는 재즈 피아니스트이다. 그의 꿈은 과거 재즈의 부흥시대처럼 작은 바에서 자유로운 즉흥 연주를 하는 연주자들을 초대해서 즐겁게 음악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실제 현실이 원하는 것에는 괴리가 있다. 그렇기에 자신이 일하는 레스토랑에서 하기 싫은 연주를 하면서 모욕을 느끼며 돈을 번다.


그는 꿈을 향해 달려가느라 실제 삶은 빈곤하다. 보험 등록이 안 된 자동차를 타고 다니고, 납부해야 할 세금을 내지 못해 친누나에게 자신의 꿈을 무시당한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꿈을 버리지 않는다. 무조건 해내겠다는 일념으로 살아간다. 어느 날 자신과 다른 영역이지만 동일한 신념을 가진 미아(엠마 스톤)를 만난다. 그리고 그녀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미아도 마찬가지다) 이후 그들은 열렬하게 사랑한다. 시간이 흐르고 사랑 앞에서 세바스찬의 꿈은 점점 옅어지게 된다. 현실적인 문제 앞에서 고뇌하기 시작한다.

성공한 음악가 키이스(존 레전드)는 세바스찬에게 재즈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아직 재즈 피아니스트가 꿈이야? 세바스찬, 재즈는 이제 한물갔어. 그들의 연주는 지금 시대 사람들에게 자극이 되지 않아. 우리는 현실을 직시해야 돼. 대중이 원하는 음악을 해야 할 때가 되었어. 어때? 나와 함께 하자."


마음속으로는 욕을 하고 싶지만 세바스찬은 미아와의 미래를 위해서 키이스의 밴드에 합류하게 된다. 슬프게도 자신의 꿈을 현실과 타협했기에 받아야 할 대가는 크다. 자신의 삶은 조금씩 상실되어가고, 꿈을 향한 모습을 사랑했던 미아는 그를 이해하면서도 서서히 사랑이 식어간다. 결국 그들은 헤어진다. 그렇지만 서로의 꿈을 이루며 영화는 끝이 난다.(꿈꿨던 꿈이 서로가 함께이지 못하는 슬픔은 간직한 채)


나는 영화를 보고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난다. 눈물을 흘린 것을 넘어 꺼이꺼이 거리며 추잡스럽게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마지막 그들이 상상했던 모습에서 아내와 나의 미래가 겹쳐 보여서일까? 혹은 그들의 과거와 현재의 힘듦이 우리 부부의 힘듦과 비슷해서 일까? 무엇이든 그들이 환희에 찬 감정을 이해한다. 그들이 겪은 고통스러운 현실을 이해한다. 이해하고 또 이해한다. 




가끔씩 자신의 한계를 느끼고 자살하는 무명 배우들이 기사에 나온다. 그들의 죽음을 보면서 사람들은 말한다.


'자살할 용기로 세상을 살면 뭐든 못하겠어'

'삶은 원래 고달픈 거야'

'다 똑같지 뭐 특별한 게 있어?'


그들의 죽음을 절대 공감할 수 없을 것이다. 죽음을 선택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들의 선택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의 선택에 대한 추론을 하지 않는다. 간절하게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상황을 마주했을 때, 참아내며 포기한 채 세상을 살아가는 것만이 정답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의 선택에 대한 저울질을 하는 사람들은 과연 간절하게 원하는 것이 있었을까?'


오직 물질적이고, 쾌락적인 것만을 간절하게 바랄 것이다. 그러한 일회성의 간절함은 진정으로 간절하다고 할 수 없다. 그러한 간절함에는 자신의 인생을 내려놓을 수 있는 용기가 포함되어 있지 않아서이다. 


잊혀 가는 재즈를 하고 싶은 사람들,

오리지널 필라테스를 하고 싶은 사람들,


그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대중들의 선택을 받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한 줄기 빛이 존재한다. 대중에게 선택받지 못하지만 다수의 사람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게 될 것이다. 인간에게는 다양성이 있기 때문이다. 대중들이 재즈와 클래식 필라테스를 알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정이 없다고 해서 그것들이 주었던 가치가 없었다고 말할 수 없다. 그것들의 절대적 가치는 처음부터 존재했다.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다. 다수의 흔들리지 않는 절대적 지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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