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되지 않은 나를 설명하는 언어
업무상 국어사전을 자주 찾습니다.
지금이야 인터넷으로 금방 사전적 정의를 찾아보지만,
꽤 오랫동안 베고 자면 목 아플 것 같은 두꺼운 국어사전이 늘 책상 한편에 있었어요.
글을 쓸 때나 읽을 때 우리는 자주 인지에 따른 뜻만 알고 있고, 정확한 뜻을 모를 때가 많거든요.
사전을 보면 그동안 보던 글자가 다르게 보여요.
그리고 요즘 사전적 정의 앞에서 자주 멈춥니다.
왜냐하면 같은 단어를 두고도, 마음속에서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흘러나오거나,
시대적 상황이나 맥락에 따라서 다르게 읽히기 시작했거든요.
〈다시 쓰는 국어 사전〉은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이미 쓰여 있는 정의에 제 작은 경험을 덧붙이고, 익숙한 단어에 다른 빛을 비추고 싶었습니다.
이 사전은 정답을 말해주지 않아요. 대신 읽는 사람마다 각자의 정의를 새겨 넣을 수 있는 여백을 남기려 합니다.
첫 번째로 펼쳐볼 단어는 ‘정체성’입니다.
나를 설명하는 또 다른 이름들, 그 무게와 의미에 대해 함께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변하지 아니하는 존재의 본질을 깨닫는 성질, 또는 그 성질을 가진 독립적 존재.
“나는 누구인가?”
누구나 한 번쯤 던져보는 질문이지만, 쉽게 답하는 사람을 아직까지 못 만난 것 같아요.
사실 스스로에게 가장 많이 던지는 질문인 것도 같고요.
확실한 건, 정체성은 단순한 자기소개 이상의 무언가라고 생각해요..
정체성(identity)은 심리학에서는 ‘자아 개념’으로, 사회학에서는 ‘사회적 역할’로 설명됩니다.
즉, 내가 어떤 경험을 했고, 어떤 관계 속에서 살아왔는가에 대한 언어의 축적인 것이죠.
흔히 정체성을 고정된 실체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매일 조금씩 변하는 나에 대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저는 SNS를 하는데요. 자꾸 새로운 계정을 만들게 되더라고요.
어떤 건 친한 친구들이 볼 수 있는 것으로,
어떤 건 회사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을 만한 것으로,
어떤 건 그 누구도 내가 나인지 몰랐으면 하는 것으로....
때로는 내 계정인 것도 같고, 때로는 내가 운영하지만 내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렇게 진짜 나는 누구일까? 그렇다면 내 진짜 정체성은 뭘까? 하고
고민하게 되었어요.
과거의 정체성은 태어난 장소, 가족, 직업처럼 비교적 단순한 틀 안에서 정의되곤 했지만
디지털 시대에 들어서면서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하나의 고정된 자아’가 아니라, 다양한 페르소나들의 균형 속에서 유지되는 유동적 존재가 되었고요.
아래 네 가지 관점에서 현대인의 정체성을 다시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자기 인식과 자존감, 정서적 안정감 등 개인의 내면에서 정체성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으로 나타납니다.
성별, 나이, 직업, 국적 등 사회 속에서 내가 속한 ‘범주’는 곧 나를 설명하는 도구가 됩니다.
내가 자라온 문화, 언어, 가치관은 정체성의 토대가 됩니다. 같은 단어도 다른 문화권에서는 다르게 받아들여지죠.
SNS 속 프로필, 피드, 닉네임 등은 모두 디지털 자아를 구성하는 요소입니다. 현실과 다른 모습으로 나를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디지털 정체성은 새로운 층위의 자아를 만들어냅니다.
전 정체성을 하나의 고정된 실체가 아닌, 나를 설명하는 수많은 언어들의 모음집이라 생각합니다.
‘콘텐츠 전략을 세우는 사람’ ‘글 쓰는 사람’, ‘프리랜서’, ‘딸’, ‘친구’, ‘혼자 있는 사람’, ‘기록하는 사람’…
이 모든 정체성이 상황과 시간에 따라 교차하며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인데요.
어떤 건 자연선택적으로, 또 어떤 건 제 선택의 결과 같아요.
딸은 선택권이 없었지만, 프리랜서는 선택한 거니까요.
우리는 누구나 인생의 어느 순간에 자신을 다시 바라보게 됩니다.
직장을 그만두었을 때, 관계가 끝났을 때, 혼자 남았을 때…
그 순간들마다 우리는 ‘나는 누구지?’라는 질문 앞에 다시 서게 됩니다.
정체성은 그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이 아니라, 매일 쓰이는 에세이 같아요.
삶의 경험과 선택, 관계와 감정이 차곡차곡 쌓이며 내가 누구인지 조금씩 명확해지는 여정이죠.
우리는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정체성을 탐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탐색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죠.
삶의 궤적 위에 남겨진 ‘나’의 흔적들, 그것이 요즘 시대의 정체성의 정의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