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이벤트를 위한 디자인 하기
지난 11월 3일, 오랫동안 준비해오던 제2회 여성 기획자 컨퍼런스가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나는 작년과 마찬가지로 초기 기획단계부터 참여해, 디자이너인 민선 님과 함께 브랜딩부터 굿즈 디자인까지 행사 전반의 디자인을 맡아 진행했다. 사실 특정한 행사를 위해 처음부터 끝까지 디자인을 해보는 경험은 많지 않기 때문에, 누군가에겐 도움이 되길 바라며 이 과정을 글로 남겨 공유하고 싶다.
제2회 여기컨의 디자인을 맡아 진행하며 가장 고민이 많았던 점은 1회와의 차별점을 어디에 두느냐였다. 1회 때 혼자 진행했던 디자인은 아쉬운 점이 많았고, 새롭게 좀 더 높은 퀄리티로 디자인을 진행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하지만 1회 때와 너무 다른, 뜬금없는 디자인이 나오면 여기컨이라는 행사의 아이덴티티가 훼손되지 않을까 걱정됐다.
또 다른 고민은 비주얼적인 방향이었다. 테크업계 컨퍼런스는 대부분 비비드한 색상이나 그라디언트, 볼드한 산세리프를 사용한 이미지를 아이덴티티로 내세우곤 한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여기컨은 그렇게 '테크테크한' 컨퍼런스는 아니었던데다, 흔히 쓰이는 비주얼 스타일을 따라가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일부러 다른 디자인을 추구하자니 그래픽 전시 아이덴티티처럼 보이거나 디자이너가 욕심을 부려 컨퍼런스가 가진 성격이 묻혀버린 꼴이 될까 봐 우려스러웠다. 어떻게 작년과 다르면서도 일관된 디자인을 하느냐, 또 어떻게 너무 전형적인 컨퍼런스 같진 않지만 컨퍼런스 같기는 한 디자인을 만들어내느냐 하는, 모순된 명제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1회 여기컨에서는 'Meet, Share, Achieve'라는 슬로건을 설정하고, 각 단어에 사각형, 삼각형, 동그라미라는 세 가지 도형 심볼을 부여하는 식으로 디자인을 진행했다. 가장 단순한 도형에 여기컨이라는 행사가 지닌 의미를 담고, 페미니즘의 대표적인 색상인 보라색과 그 톤에 맞는 레드를 활용한 아이덴티티였다. 1회와 비교했을 때 2회 여기컨이 지닌 가장 큰 차이점은 여러 이벤트가 동시에 진행된다는 점이었고, 이를 드러낼 수 있게 강연 / 워크샵 / 라이트닝 스피치라는 트랙별 성격을 살린 심볼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마침 진행되는 트랙이 3개였으므로, 작년처럼 세 가지 심볼을 만든다면 1회 여기컨의 디자인을 연상시킬 수 있을 터였다. 그래서 이 세 가지 심볼을 그라운드 룰로 두고, 함께 디자인을 맡은 민선 님과 각자 시안을 발전시켜 더 나은 방향으로 수렴해나가기로 했다. 또한 시안이 너무 동떨어지지 않도록 초기에는 오프라인에서 만나 슬로건에 맞는 한글/영문 폰트와 심볼에 쓰일 아이덴티티 컬러를 픽스했다.
하지만 이 동일한 아이덴티티를 바탕으로 우리가 각자 가져온 시안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민선 님은 라인이 중심이 되는 심볼을, 나는 색상에 집중한 솔리드 심볼로 디자인을 발전시켰다. 두 디자인이 너무 다르다 보니 그 사이에서 빠르게 합의점을 찾지 못했고, 어느 이상으로 밀도와 퀄리티를 올리기도 어려웠다. 결국 이 시기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둘 다 납득할만한 시안이 나올 때까지 새로운 시안을 계속 만들어 투척해야 했다. 행사 디자인을 하는 과정에서 가장 시간도 오래 걸리고 고민이 많은 시기였다.
시안을 짜내다 지친 나는 여태까지 만든 시안을 모두 잊고, 역으로 디자인을 정의하는 틀을 먼저 정해보기로 했다. 대학생 시절 좋아했던 디자이너들이 '제약'을 역이용해 재밌는 디자인을 도출하는 경우를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그래픽 디자인은 정해진 것이 별로 없는 백지상태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아서, 스스로 제약이나 형식을 정해두면 오히려 디자인을 구체화 시키는 데에 도움이 된다.
작년 여기컨을 되돌아봤을 때 이미지를 활용한 홍보는 대부분 SNS상에서 이루어졌기에, 많이들 사용하는 A4 비율의 포스터 디자인은 사실 홍보에 그리 적합한 사이즈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홍보에 최적화된 인스타그램처럼 정사각형 형태인 포스터를 만들면 어떨까'라는 데에 까지 생각이 미쳤다. 정사각형은 스마트폰처럼 작은 화면에서 봤을 때 섬네일이 잘릴 위험도 적고 한눈에 더 잘 들어온다. 타일이나 모자이크에서 쓰이는 형태라는 점과 어느 쪽으로 회전해도 같은 비율이라는 특징 또한 활용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위 이미지처럼 90도씩 회전하면 형태가 달라지고 이를 연결하면 또 다른 형상이 보이는 매스게임 같은 포스터 초안을 구상했다. 온라인에서는 잘 보이고 오프라인에서는 또 다른 형태로 재미를 줄 수 있는 시안이었다. 이전 시안과는 확실히 다른 캐릭터를 가지고 있는 점도 좋았다. 민선 님도 위와 같은 디자인 방향에 동의했고, 이전에 이야기했던 심볼과 컬러를 이 초안에 적용해 발전시켜보기로 했다.
결과적으로 위처럼 기존에 진행한 컬러심볼 시안과 매스게임 시안 속 그리드를 결합한 시안이 완성되었다. 매스게임 시안은 여기컨과의 연결고리가 다소 약했고, 심볼만 있는 시안은 밀도가 낮아 보여 문제였는데 둘을 결합하니 그런 단점들이 대부분 상쇄되었다. 강연/워크샵/라이트닝 스피치를 상징하는 심볼은 각자 다른 도형을 활용해 다양한 베리에이션을 시도했다. 그 중 의미가 와 닿으면서도 서로 형태가 분명히 구분되고, 차지하는 면적이 균일하도록 세 가지 심볼을 결정했다. 처음부터 포스터를 리소프린트 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기 때문에 심볼 색상은 리소 잉크 색상 중에서 골랐다.
사실 민선 님과 나는 둘 다 BX 디자이너가 아니다. 게다가 회사에 다니면서 퇴근 후에 만나 미팅하고, 주말에 쉬지도 못하고 계속 작업하느라 스트레스를 받을 때도 잦았다. 하지만 여기컨은 업무가 아니라 같이 만들어나가는 우리 일이라고 생각해서 열심히 할 수 있었고 디자이너로서 욕심도 났다. 내가 여기컨에 기여하는 만큼 나도 여기컨을 통해 얻어가는게 있길 바랐고, 이번 기회에 찔끔찔끔 공부해오던 코딩을 이용해 웹사이트를 만들어보자 싶었다. 사실 웹사이트를 혼자서 완성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지만, 일단 저질러야 열심히 공부할 것 같아 멤버들에게 만들겠다고 선언해버렸다.
바닥부터 사이트를 만드는 건 어려워서 부트스트랩을 처음으로 활용해봤는데, 맞닥뜨린 문제들을 하나하나 해결하다 보면 내가 생각한 대로 웹사이트가 나오는 게 너무 신기했다. 이전에는 간단한 css 수정밖에 안 해봤던 내가 여기컨 웹사이트를 만들면서 텍스트와 이미지를 반응형에 최적화하는 법, 웹폰트를 적용하고 도메인을 사서 연결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웹사이트를 완성하고 나니 SNS에서 눈길을 끌 수 있는 GIF 포스터도 만들고 싶었다. 배경은 고정된 채로 각 심볼이 차례로 나타나는 GIF 포스터라면, 정적인 포스터보다 디자인 의도를 더 잘 전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전문 분야는 아니지만 애프터 이팩트를 다룰 줄은 알아서 서툴게 포스터를 만들었는데, 모션 전문가인 민선 님이 각 심볼에 더 어울리는 움직임으로 포스터를 다듬어주셨다. (같은 디자이너라도 전문 영역은 그 분야 디자이너에게 맡겨야 한다는 걸 새삼스레 다시 느꼈다) 그 결과 아래처럼 눈길을 사로잡는 동적인 포스터를 홍보에 활용할 수 있었다. 웹사이트나 모션은 사실 여기컨이 아니어도 혼자 공부해볼 수 있는 분야지만, 결과물이 실제로 쓰일 거라고 생각하면 훨씬 강력한 동기부여가 된다. 나 또한 그 덕에 단기간에 결과물도 낼 수 있었고 스스로도 공부가 많이 되었던 것 같다.
위에서 설명했듯 올해 여기컨에는 민선 님이 합류해 두 명이 함께 디자인을 진행했다. 디자이너로서 나와 민선 님의 성격은 극단적으로 달랐는데, 그게 오히려 작업을 진행하는 데에 도움이 되기도 했다. 나는 큰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디자인 개념을 만들어나가는 걸 좋아했는데 민선 님은 디테일하고 실제적인 부분을 챙기는 데에 능했다. 그래서 내가 아이덴티티에 대해 좀 더 고민하는 동안 민선 님은 여기서 굿즈와 패키지 쪽을 맡아 진행해 주셨다. 1회 때 굿즈를 만들기만 하면 실수해서 재인쇄에 퀵배달을 했던 나와는 달리 민선 님은 굿즈 종류 선정부터 시안 작업 그리고 발주까지 아주 깔끔하게 진행해주셔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사실 여기컨을 위해 디자인 한 물품을 나열하면, 아이덴티티 이외에도 외/내부 현수막, X배너, 입장권과 시간표, 펀딩 사이트 배너 및 소개 이미지, 연사 SNS 소개 개별 이미지, 뱃지와 전차스, 볼펜, 스태프 후디, 발표 PPT 슬라이드 형식, 굿즈 담을 패키지, 패키지에 붙일 스티커, 웹사이트 디자인, 당일에 쓸 보드 등 숨이 찰 정도로 엄청나게 많다. 1회 때는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이런 것들을 혼자서 꾸역꾸역 처리해야 했는데, 2회 때에는 둘이 적절히 일을 분담하고 한 사람이 바쁠 때마다 다른 사람이 일을 진행해 줄 수 있어서 정말 든든하고 큰 도움이 되었다. 또 시안이 나올 때마다 크로스체크가 가능해서 바로잡을 수 있었던 오타와 실수도 많았다.
이처럼 두 디자이너가 시안을 좁혀가는 데에 어려움도 있었지만, 긍정적인 측면이 더 많았다. 혼자였을 때는 잘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감도 혼자 짊어져야 했고, 디자인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을 수 없어 시안을 발전시키는 데에 한계가 분명하게 느껴졌다. 팀원들이 디자인이 좋다고 칭찬을 해줘도 '다른 디자이너가 봐도 정말 좋은 디자인일까?'하는 아쉬움과 걱정을 떨쳐내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민선 님이 합류하고 난 후에 내 디자인에 피드백을 해주고 함께 발전시켜나갈 사람이 있다는 점이 정말 힘이 되었다.
사실 어떤 행사든 대부분 연사와 콘텐츠를 보고 참석을 결정하기 때문에, 행사 자체의 내용이 중요하지 디자인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번 여기컨의 큰 강점 중 하나가 바로 디자인이었다고 생각한다. 여기컨의 기획이 아주 새롭게 느껴졌던 작년과는 달리 올해는 여성 관련 행사들이 부쩍 많아졌고 콘텐츠의 질도 올라갔다. 반가운 일이지만 어찌 보면 경쟁 행사가 많아졌다고도 볼 수 있는데, 그 수많은 행사 속에서도 여기컨의 확실한 아이덴티티 디자인 덕에 좀 더 차별화가 될 수 있었다. 또 행사라는 게 당일이 되기 전까지는 물리적인 실체가 없는 만큼 디자인이 사전에 신뢰를 부여하고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데에 큰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다. 텍스트로는 다 전하기 어려운 행사의 분위기와 지향점도 디자인을 통해 어렴풋이 전할 수 있었다고 할까.
행사를 위한 디자인을 하다 보면 절대 컴퓨터 앞에서 작업이 끝나지 않는다. 장소 섭외를 위한 미팅에도 함께 참여해야 하고 여러 굿즈와 인쇄물을 일일이 주문하고, 수령하고, 설치하고, 또 포장해야 한다. 실제로 여기컨 팀도 행사 전날 모여 자정에 가까운 시간까지 남은 굿즈를 포장하고 현수막을 설치했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여러모로 고생스럽긴 했지만, 내가 만든 디자인이 한 행사를 대표하거나 참석자들이 눈앞에서 내가 디자인한 굿즈를 사용할 수 있어 성취감도 컸다. 게다가 여기컨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만나지 못했을 다양한 직군의 멋진 동료들도 얻었다. 이처럼 여기컨을 위해 디자인했던 경험은 디자이너로서 나에게 큰 자산이 되었다.
민선 님과 내가 디자인에 집중하는 동안 연사 섭외, 워크샵 기획, 외부 홍보 등 다른 모든 일들에 애써주시며 행사를 함께 성공적으로 만들어 주신 여기컨 팀께 감사드린다. 자타공인 일잘러인 멤버들이 아니었다면 여기컨이 이처럼 성공적인 행사가 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2회 여기컨이 끝나고는 모두 회고글을 쓰기로 약속해, 다들 각자의 입장에서 글을 써주셨는데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하단에 다른 멤버분들의 회고를 첨부한다.
함께 디자인을 진행한 민선님의 <여기컨, 참가부터 참여까지>
매이님의 <소규모 팀으로 컨퍼런스 운영하기>
태영님의 <어쩌다가 네트워킹 워크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