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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블제이 Feb 17. 2019

클래식 음악으로 세상에 저항하기

음악은 인간에 어떻게 작용하는가?

음악은 어떻게 인간에게 작용하는가?


우리는 매일 음악을 듣는다. 아침에 일어나서 텔레비전 혹은 라디오를 켜고, 식당에 가거나, 혹은 일터에서…… 음악과 우리의 생활은 너무나도 밀접하여 음악을 듣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기 십상이다. 이처럼 음악이 인간의 생활에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실제로 음악이 우리에게 특별한 효과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음악뿐 아니라 모든 예술이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주지할 바 없는 사실이다. 미술작품을 감상하는 경우 시각적으로 인식하는 작품의 세세한 부분들이 개개인의 경험과 융화하고, 이로써 미술작품을 통한 감정이 발생한다.


다른 어떤 종류의 예술과 음악이 다른 점은 음악이 시간 축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음악이 연주되는 시간 동안에는 해당 음악과 관련된 모든 이들이 같은 시간을 공유한다. 즉, 음악이 전개되는 과정이 시간을 따라 이동하고, 인간이 가지는 변덕스러운 감정의 진행과정이 시간을 매개체로 하여 음악을 통해 전달되는 것이다. 또한 이는 음악의 형식에 구애 받지 않는다. 가령, 존 케이지John Cage의 ‘4분 33초’의 경우, 연주되는 음악이 ‘침묵’이라 하더라도 음악을 연주하는 이 및 듣는 이로 하여금 시간이라는 일정한 틀을 공유하며, 4분 33초라는 시간 동안 청자는 (혹은 연주자도) 이 틀 안에서 해당 시간이 주는 의미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같은 개념으로 지어진 황지우의 '묵념, 5분 27초'와 비교할 때 이러한 의미는 더욱 강해진다. (제목 외에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황지우의 시를 읽을 때 우리는 모두가 5분 27초를 지켜가며 시를 읽지 않는다. 그러나 존 케이지의 4분 33초는 그 시간 동안 자리에 앉아 4분 33초를 지켜내야 하는 것이다.


음악이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방식은 연주음악의 경우에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예컨대 연극이나 영화의 경우에는 관람하는 이로 하여금 특정한 사고를 언어적인 방식, 즉 직접적으로 특정 개념을 환기시켜 이에 관한 경험과 감정을 유도한다. 이에 반해 (가사를 가지지 않은) 음악은 신체와 사고에 직접적인 방식, 즉 언어라는 제2의 필터를 통하지 않은 방법으로 신체적 반응을 일으키고 이로서 특정 감정을 일으키는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면 이러한 비언어적 음악을 통해 우리는 어떻게 영향을 받는가? 우선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음악의 물질성이다. 음악은 초음파와 초저주파를 포함한 소리로서, 빠르거나 느리고, 규칙적이거나 규칙적이지 않다. 빽빽하게 짜인 것으로 인식될 수도 있고, 느슨하게 연결된 것으로 인식될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오케스트라를 생각할 때, 관객들은 바이올린 연주자가 현을 켜는 것, 지휘자가 손을 저어 지휘하는 것, 때때로 악기 연주자들이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 (말러 교향곡 1번의 마지막 악장을 생각해보자) 등을 시각적으로 포착한다. 이러한 물리적인 관측이 해당 악기 혹은 지휘가 만들어내는 음과 어우러져 인간의 신체적 반응을 발생시킨다. 이를 통해 관객은 공감각적으로 이 전체의 과정에 반응하는데, 이런 반응은 의식적 반응이 아니라 비자발적 반응에 가깝다.


또한 음악이 생산해내는 사운드 자체, 즉 음악이 만들어내는 리듬과 화성, 선율 등을 통해 기쁨, 환희, 애절함, 권태, 슬픔 등 다양한 감정을 환기시킬 수 있으며, 이러한 측면은 곧 음악의 상징적 의미와 연계된다. 예컨대 베토벤 교향곡 9번 4악장에서 빽빽하게 짜인 상승하는 음계와 그 이후 이어지는 합창은 그 연결작용을 통해 더욱 극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하며, 가사를 이해하지 않더라도 음악 자체가 불러오는 환희를 물리적이고도 관습적인 방법으로 느끼게 만들 뿐 아니라,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정적이고 체화된 반응을 촉발할 수도 있다. 또한 B조 미사 가운데 “십자가에 못 박히심”은 십자가라는 제재와 연합된 조인 마단조로 작곡되어 있다. 여기서 오랜 경험은 청자의 습관, 즉 음악이 불러낼 법한 상징적 연상에 대한 반응 패턴이 된다.


이렇듯 음악은, 음악만이 가지는 특성을 통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특정 반응을 이끌어낸다. 생활에서 어떠한 생각을 가지는 것이 곧바로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감정은 양자 사이에서 지렛대 역할을 하여 의식을 행위로 옮기도록 만드는 구심점이 된다. 이에 관해 고마트와 헤니언은 1999년 연구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음악 사용자는 잠재적으로 외적인 원인이 되는 힘이 자신을 사로잡아 점령하도록 내버려둘 조건을 충족시키려고 이래저래 애쓰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수용성은 무위의 한 계기도 아니요, 돌연 충분한 주체이기를 저버리는 사용자의 의지 결여도 아니다. 오히려 행동을 증가시키며 행동을 잠재력화 한다.” 특히 앞서 설명한 음악의 시간성으로 인해 그 음악을 연주하는 자 및 듣는 자가 모두 한 묶음의 시간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음악이 주는 이러한 효과는 개개인 뿐 아니라 집단에서 더욱 강력한 효과를 발휘한다. 이러한 얼개에서 볼 때, 감정이야말로 사회적 행위의 체화된 성격에 접근하는 방식을 탐구할 수 있게 한다.


음악을 이용한 권력, 권력으로서의 음악


음악과 이에 대한 신체적 및 감정적 반응에서 한 차원 나아가, 음악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는 개인 각자의 생활에 달려있다. 즉 경우에 따라 음악은 단지 일차적으로 수용되는 소비재로서의 역할을 가질 수도 있고, 일부 청자의 경우에는 이를 주체적으로 인식하고 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생활에서 음악은,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간에, 이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혹은 영화에서 음악은 관객의 감정을 고양시키기 위한 장치로서 사용된다. 뿐만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도 이는 마찬가지다. 예컨대 쇼핑몰의 경우 소비를 촉발하기 위한 무자크가 배경 음악으로 깔린다. 이러한 결합은 이를 듣는 행위만 아니라 이로 인해 발생하는 감각의 거리를 최소한으로 축소시켜,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인식하기 어렵게 만든다. 이처럼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음악이 가지는 힘은 문화와 시대를 망라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구성하는 일부로서 여러 형태의 변화 상황과 결부되어 있다. 이는 곧 음악이 가지는 힘이 우리의 몸, 생각, 더 나아가 각 세대, 계층과 관련하여 의식구조를 형성한다는 것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음악을 단순한 미학적 관점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그 전체적인 속성에 주목하고, 사회적 맥락 하에서 구조적으로 음악을 바라보아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


서구 음악의 역사는 시대를 둘러싼 음악을 통해 다양한 힘을 모으려는 시도와 이 힘에 문제를 제기하려는 시도로 이루어져 있다. 고대의 경우 비판정신이 음악가의 한 역할로서 인정되어, 신을 찬미하는 음악을 하던 힐데가르트 폰 빙엔은 교회에 충실하기 보다는 환상과 신비주의에 관한 저술을 많이 남겼으며, 심지어는 교회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이후 바흐는 종교음악의 목표가 “회중을 불러모아 조직하는 것”이라는 공식 견해를 내놓기도 했다. 근대에 이르러 베를린필과 푸르트뱅글러는 하켄크로이츠 아래에서 베토벤을 연주했고, 이후 음악으로 정신적 무장이 해제된 틈을 타 히틀러는 나치 부대를 움직여 공습을 감행했다. 역사적으로 음악은 권력의 전령이 되기도 하였으며, 강한 권력일수록 음악뿐 아니라 전반적 예술의 힘을 빌어 그들을 정당화시키기도 하고 사회를 통제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곤 하였다.


음악의 이러한 역할은 음악이 사람의 정신상태를 지배한다는 생각에 기초한다. 바로 이런 특성 때문에 음악은 권력에 의해 때때로 금지되거나 혹은 의도적으로 동원되어왔다. 쇼스타코비치는 러시아 혁명 기념일을 기리는 교향곡을 작곡한 이후 질책을 받아왔으며, 현대에 들어 와서는 (특정 매체의 보도에 따르는 경우) 아프가니스탄에서 거의 모든 형태의 음악이 금지되기도 하였다. 특히 인터넷의 발달로 쌍방향의 매체가 주를 이루고, 개인의 생활과 삶에 관하여 다양한 선택지가 주어지면서, 개인이 어떤 음악을 듣는지는, 개인이 처한 사회적 현실 및 개인적 상황, 성장배경, 교육상태 등 모든 것을 포괄하는 하나의 지표로 인식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음악을 듣는 행위는 단순한 개인의 취향이 아니라 ‘취향’이라는 말로 뭉뚱그려지는, 혹은 제 흔적을 스스로 지워가는 사회적 계급의 발자국이 된다. 특정 음악을 듣는 행위 자체가 개인이 속한 사회적 계층의 속성으로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바라볼 때 오늘날의 클래식 음악은 음악과 사회 사이의 매개로서 권력관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팝 음악의 경우,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으나, 많은 경우에) 가사 및 표출하고자 하는 감정이 직설적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클래식은 전혀 다르다. 가사가 없거나, 있더라도 팝 음악에서처럼 ‘너를 사랑해’가 아니라 사랑의 일생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시를 인용하고, 짧게는 1시간 미만에서 길게는 5시간을 넘기는 오페라로 이어지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음악을 위해 사용되는 장치는 독주, 쿼텟, 스트링텟, 오케스트라 등 셀 수 없이 많다. 음악의 아름다움을 배가시키는 다양한 도구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리듬, 화성, 선율, 조성과 형식 등 그 기초를 이루는 이론에 관해 특별한 공부가 필요하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와 시간 및 비용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결과적으로 클래식 음악은 단순한 음악이 아니라 특정 계급의 사람들만이 향유할 수 있는 독특한 언어에 가깝다.


계급적 특성으로서의 음악


서울시향의 티켓 가격은 C석 1만원부터 시작한다. 주말에 영화관에 가는 것과 같은 가격이다. 다양한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고, 상임 지휘자인 정명훈을 필두로 오케스트라 단원의 연주실력 역시 훌륭하다. 또한 다양한 객원 지휘자 및 솔로이스트들이 한국을 방문한다. 서울시향뿐만 아니라 경기필, 수원필 및 부천필 등 대한민국 내 다양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독창적이며 사람들의 흥미를 돋우는 훌륭한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도 사람들은 클래식 음악 공연을 관람하러 가는 것에 특별한 용기가 필요하다는 듯 생각한다. 말하자면 클래식 공연은 ‘가는 사람은 가고’, ‘안 가는 사람은 평생 가지 않는’ 종류의 일로 여겨지고 있다. ‘평생 가지 않는 사람들’의 경우, 두 시간여의 훌륭한 공연과 저렴한 티켓 가격에도 불구하고 클래식음악에 대해 접근하는 것에 일종의 거부감을 느낀다. 이런 클래식음악에 대한 관심의 저하는 실질적으로 오케스트라를 와해시킨다. 북아일랜드의 울스터 오케스트라의 경우에도 2014년 28%의 지원 삭감으로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 서울시향의 경우에도 해마다 서울시 출연금은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재정적 위기가 클래식 음악의 위기의 원인이 되리라는 점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클래식 음악을 듣는 인구가 전체의 3%밖에 되지 않으며, 이 수치가 4%만 되어도 클래식 음악시장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이야기들을 한다. 클래식 음악이 퇴조되고 있고, 새로이 유입되는 청자가 다른 장르에 비해 현격하게 적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클래식 음악이 ‘더 이상 쿨Cool하지 않아서’ 가 아니다. 상기한 바와 같이, 클래식 음악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다양한 배경지식과 ‘언어로서의 클래식’을 배울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지지 않았거나, 혹은 애초에 그러한 여건을 가질 수 없도록 만드는 강력한 사회장치가 공기처럼 깔려있는 까닭이다. 과거에 권력이 음악을 이용하는 방식이 직설적이고 가시적이었다면, 현대에 이르러 등장한 새로운 권력층이 음악을 통해 대중을 움직이는 방법은 보이지 않는 사회적 기제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서 있다.


사회구조를 파악하는 관점에 있어서, 피에르 부르디외는 그의 저서 『구별짓기』를 통해 ‘아비투스Habitus’라는 개념을 주장한 바 있다. 아비투스는 선천적인 무엇이 아니라, 환경, 교육, 사회계층 등에 의해 후천적으로 구별 지어지는 사회 계층적 성향을 의미한다. 이러한 개념에 입각할 때, 특정 문화에 대한 선호의 정도는 누가 더 문화적으로 더 성숙했다거나 똑똑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개인이 속한 각기 다른 사회적 환경과 이러한 사회적 환경에서 파생되는 사회 계급에 의한 취향의 문제일 뿐이다. 예컨대,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사회적 계급에 따라 일정한 교육 과정을 밟는다. 이는 해당 계급으로 하여금 공통된 아비투스를 갖도록 유도한다. 이를 사회 전체로 환원하면, 이는 단순 지식뿐 아니라 예술과 생활 전반에 대한 사회적 무의식 형성으로 이어진다. 이로써 특정 문화에 대한 접근, 즉 자신이 속하지 않은 타 계급의 문화에 대한 접근은 무의식적으로 차단되고, 이러한 맥락은 시간이 지날수록 공고해진다. 이러한 단단한 아비투스와 이로 인해 발생하는 무의식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속한 장Field을 뛰어넘는 행위를 시도하는 것 조차 어렵게 만든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사람들이 스스로의 취향을 획득하는 과정은 각자가 속한 계층적 구조 뒤에서 이루어지며, 이렇게 형성된 취향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가지는 취향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사회 구성원 스스로가 자신의 취향을 ‘선택’했다고 믿게 만드는 한편,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실제로는 선택할 수 없었던) 사회의 다른 부분에 관하여는 깊게 생각하는 것이 불가능 하게 되고, 이것이 현재의 클래식 음악에 대한 무관심과 거부감의 원인이 된다. 사람들은 클래식 음악을 ‘아는 게 없어’ 듣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는 게 없는 것이 아니라, 교묘하고도 체계화 된 사회적 압력이 이를 알 수 있도록 허용하지 않았을 뿐이다. 이러한 편견은 클래식 음악을 더욱 멀어지게 하는 한편, 충분히 음악적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청각적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알아차리기 어렵게 만든다. 그러나 이를 가능하게 하는 계기가 있는 경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클래식이라는 장으로 넘어올 수 있다. 즉, 접근하는 방법이 주어지면 이러한 모멘텀이 생각보다 쉽게 깨어진다는 이야기이다.


이번 조성진의 쇼팽 콩쿠르 우승 이후 불고 있는 ‘조성진 열풍’은 ‘모멘텀 깨기’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클래식음악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도 ‘세계 대회 우승’이라는 사건을 통해 조성진이라는 연주자는 물론 쇼팽 컴페티션이 어떤 대회인지, 나아가 쇼팽은 어떤 음악을 했는지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조성진의 어떤 특별한 점이 그를 우승하게 만들었는지 확인하고 싶은 대중들은, 다른 참가자와 조성진의 차이를 느끼기 위해 알요샤 쥬리닉, 케이티 리우 등 다른 파이널 엔트리의 클립을 클릭한다. 또한 조성진의 연주를 듣고자 티켓을 구매하는데 주저함이 없었으며 (심지어 홈페이지가 폭주하기도 했다), 주최측은 이례적으로 추가공연을 편성했다.


이러한 현상은 2005년 BBC에서도 일어났다. 당시 BBC에서 일하던 로저 라이트가 베토벤의 교향곡 전곡을 일주일 동안 웹에 올렸다. 연주 단체는 영국인들이 낸 시청료로 봉급을 받는 BBC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였고, 지휘자는 지아난드레아 노세다였다. 이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누구도 큰 호응이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으나, 이 서비스가 시작되고 무려 140만명이 넘는 다운로드를 기록하였다. 라이트는 이 결과에 몹시 흥분했다. ‘우리는 이것이 계기가 되어 새로운 청중들이 온라인으로 클래식 음악을 찾아 듣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가 BBC웹사이트에 남긴 말이다.


이처럼 특별한 사건이 벌어지거나, 클래식 음악에 접근할 수 있는 일정한 기회가 생길 때, 사람들은 클래식 음악 듣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특별한 사건들이 벌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사회적으로 조성되는 아비투스를 개인적 차원의 문제로, 본질적이기보다는 부차적인 문제로 전가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아비투스라는 계층관념이 사회적으로 형성될 뿐 아니라 이것이 무의식적 작용을 통해 사회를 정의하고 지배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위와 같이 더 많은 사람들이 사회적 모멘텀을 깨고 새로운 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추진력은 오로지 사회적 차원에서 논의되어야 한다. 결국 개인에게 주어진 아비투스를 극복하고 다른 장으로 나아가는 것은 단순히 음악적 측면, 클래식의 부흥뿐 아니라, 개인이 스스로가 처한 사회적 구조 및 압력을 인식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


통제에 저항하는 동력으로서의 음악


 윤이상이 태어난 1917년, 대한민국은 일본의 식민지였다. 일본어로 음악을 공부하고 가사를 만들던 윤이상은 곧 한국어로 된 음악을 만들고자 했으나 연주 금지 처분을 받고 일제로부터 탄압을 받기도 하였다. 유년기 때부터 음악 공부를 통해 서양음악을 접하면서, 남사당패나 판소리를 들으며 열광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서양음악과 전통음악을 골고루 들을 수 있었던 환경 때문인지, 초기 작품들에서는 뚜렷한 민요나 전통음악 풍의 선율을 들을 수 있으며, 동시에 쇤베르크나 버르토크의 현대적인 기법을 절충시키려는 움직임도 나타난다. 이후 이주한 독일에서 발표한 첫 작품들은 12음 기법 등 서구 현대음악의 영향 아래 있으나, 동시에 동양의 전통음악들에서 나타나는 미묘한 음의 떨림이나 호흡이 긴 정적인 선율, 이를 표현하기 위한 특수 연주법 등을 가미해 마치 오케스트라로 그리는 수묵담채화를 보는 듯한 인상을 준다.


1967년 중앙정보부에 의해 간첩으로 몰려 10년을 구형 받기도 하였는데, 이 때 공산주의에 적대적이었던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등 굵직한 음악인들의 구명활동이 이어지기도 하였다. 이후에는 자신이 겪었던 고통이나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비판 등을 작품에 반영하게 되었고, 분명한 메시지를 담은 작품들이 발표되었다. 가사가 들어가는 곡들의 경우, 노자의 도덕경이나 성경 등 동서양 종교/철학서의 인용 외에 넬리 작스나 알브레히트 하우스호퍼 같이 나치에 의해 탄압당한 유대인/반체제 인사의 시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 의 경우 독일 유학 후 최초로 한국어를 가사로 사용한 곡으로서, 이 곡에서는 백기완이나 고은, 문병란, 박봉우, 박두진, 양성우, 김남주 등의 재야/민족계 문학가들의 시를 주로 사용했다. 또한 마지막 작품인 '화염 속의 천사' 의 경우, 1980년대에 분신 자살한 학생들의 영령을 기리기 위한 곡이라고 분명히 발표했다. 윤이상 자신의 악곡 해설문을 보면 핵전쟁의 위협이나 인종차별, 인권유린, 환경오염 등의 현실을 비판하고자 했다는 내용을 자주 찾아볼 수 있다.


 근대에 이르기까지, 음악을 이용한 통제는 무척 가시적이고 직접적이었다. 특정 음악을 금지하고, 유명한 곡을 개사하는 등, 음악을 통해 권력을 비호하는 사상을 대중이 더욱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들었다. 때문에 이에 저항하는 음악의 방식 역시 음악 자체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윤이상이 그러하였고, 쇤베르크의 칸타타 ‘바르샤바의 생존자’ Op.46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 뿐만이 아니다. 한스 베르너 헨체, 리게티, 크세나키스, 테오도라키스…… 수많은 작곡가들이 탄압과 박해에 칼 대신 펜을 들고 거침없이 곡을 써 나갔으며, 이것이 음악가들이 싸우는 방법이었다. 이에 관해 윤이상이 남긴 말은 의미가 깊다. “작곡가는 단순한 예술가가 아니라 그 세상을 살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에 무심할 수 없다. 인간적인 고뇌, 압제, 부당함이 이 세상에 여전히 존재한다. 고통이 존재하고, 오류가 존재하는 그곳에 나는 내 음악을 가지고 함께 나아갈 것이다.”  이렇듯, 음악은 이를 이용하는 주체에 따라 전혀 다른 양상을 취한다. 어떤 이에게 음악은 단순히 듣고 즐기는 유흥이기도 하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대중을 조정할 수 있는 무기로, 또 다른 어떤 이들에게는 대중을 고무시키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현대사회가 가지는 특이점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더 이상 싸워야 할 공통의 적을 찾기 어렵다는 점이다. 양반-시민-노비, 혹은 귀족-시민-노비 등 전근대사회가 가지고 있던 가시적인 계급체제에서 벗어남으로써 사람들은 이 사회에 계급이 철폐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계급은 세 가지 혹은 네 가지의 단순화된 구조가 아니라, 개인이 가지는 자본의 크기에 따라 더욱 세세하게 구별되었을 뿐이다. 이러한 체제 아래서 아비투스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공고화되고, 음악을 통한 사회적 통제의 기제는 교묘하고 간접적이다. 선택의 범위를 벗어나 존재하는 사회적 계층이라는 테제는 사람들로 하여금 선택할 수 있는 문화적 옵션의 수를 줄여나가고, 자신이 선택했다고 믿는 것이 실제로는 계급적 성격으로 주어진 무엇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클래식 음악을 선택할 수 있는 자는 결국 클래식 음악을 선택할 수 있는 환경에 있는 자 일 뿐이다. 이처럼 사회의 장막에 가려진 ‘선택’이라는 문제는 클래식 음악을 사회의 언저리로 내몰았다. 결국 클래식 음악의 위기, 클래식 음악계가 겪고 있는 클래식 대중화는 클래식 음악과 이를 향유하던 계층 자체가 초래한 문제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음악 그 자체로 저항하기’는 더 이상 이러한 간접적인 사회기제를 변화시킬 수 없다. 사람들이 클래식 음악을 선택할 수 있는 그 무엇으로 간주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교육이다. 공교육의 일환으로서 아이들에게 클래식 음악을 가르치고, 그것이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옵션 중 하나라는 것을 알게 하는 것으로 아비투스에 저항할 수 있다. 물론 공교육이라는 시스템이 다른 어떤 것과 마찬가지로 아비투스를 형성하는 가장 큰 요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현 시점 아래에서 최소한 사람들로 하여금 클래식 음악이 선택 가능한 옵션임을 알릴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점도 부정할 수 없다. 교육을 받는 모든 아이들이 클래식 음악 애호가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또 클래식 음악을 싫어하는 아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요는, 모든 아이들, 더 나아가 전 세계 사람들이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게 만들자는 것이 아니다. 클래식 음악에 대한 접근성을 보장하고, 클래식 음악을 선택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 앞서 언급하였듯 현재의 클래식이 특정 사회적 계급의 언어로서 작용한다면 그것을 공용어로 만드는 것, 그것이 클래식 음악의 대중화, 더 나아가 클래식 음악으로 통제에 저항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무엇이 통제인지조차 가늠하기 어려운 현 세대에서, 미래의 그 자체인 아이들에게 클래식 음악을 가르치는 것은 우리가 해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평화로운 저항방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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