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30년 전 취재수첩을 꺼내다

안목의 뿌리, 90년대 패션계의 경고는 왜 지금도 유효한가

by 유수연

요즘 거리를 걷다 보면 'K-패션'이라는 단어가 공기처럼 당연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30년 전 아니 20년 전까지만 해도 제 기억 속의 대한민국 패션은 조금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90년대, 패션이라고 하면, 누군가에게는 실험의 장이었고, 누군가에게는 전쟁터 같은 생존의 현장이었습니다.


저는 그 태동기를 취재수첩 하나 들고 현장에서 기록했습니다.

한국섬유신문사라는 곳에서 일을 했죠. 당시 저는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신입기자였는데 패션 어드바이스 '판매센스'라는 고정 코너를 갖게 되었습니다.


소비자의 눈으로 패션 판매현장을 취재하는 게 눈에 띄었나 봅니다. 그 글은 당시 패션 브랜드 영업부에서 비상한 관심을 갖고 읽어주었죠.


이후 인기가 많아지자, 93년에는 리테일 지침서인 패션 마케팅 지침서로 '판매센스'를 출간했고, 95년에는 저의 '패션어드바이스' 코너를 비즈니스 전략서 'Know how-No how'라는 책으로 펴냈습니다.


정말 패션브랜드사들이 마케팅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던 시절이었던 것 같습니다.


연재하던 판매센스가 책으로 발간되자 패션브랜드사 영업부의 주문이 늘어났다

제 서랍 속 빛바랜 수첩에는 지금은 거장이 된 디자이너들의 뜨겁던 시절과, 글로벌 브랜드들이 처음 한국 땅을 밟던 순간들이 잠자고 있습니다.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30년 전의 그 컬럼들이 지금의 디지털 정글에서도 유효할까?


그 답을 찾기 위해, 1995년 1월 제가 썼던 글을 다시 꺼내 봅니다. 패션 비즈니스 이야기, 패션 디자이너 이야기, 패션컬렉션 그 이후... 흥미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차근차근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일거에 닥쳐오는 소비변화에 우리 패션업계도 당황한 듯 남아있는 상품들을 처분하기 위한 세일정책으로 치달았다. 그러나 노하우는 여전히 쌓이지 않았고, 아무 대책 없이 알몸으로 세계시장에 내동댕이 쳐진 이 현실을 우리는 종종 국제화라는 단어로 미화시키곤 한다
....
우리 패션 비즈니스 업계는 왜 잘 팔렸는지, 잘 안 팔렸는지를 이유도 모른 채,
내년에도 해외 정보를 받아 그대로 만들어 팔면 된다는 주먹구구가 통용되어 오고있다.
....
우리에겐 '왜?'라는 분석력이 없을까... 이제 2000년, 뉴미디어 시대로 진입할 것이다. 이전의 유통 구조가 무너져 내리는 새로운 시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95년 1월 know how-No how 책머리말 중-


놀랍게도 30년 전의 경고와 예견은 2026년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기술은 변했지만 사람의 마음을 얻는 비즈니스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기록들을 하나씩 꺼내 놓으려 합니다. 과거를 통해 내일의 안목을 얻고 싶은 당신에게, 저의 낡은 취재수첩이 작은 이정표가 되길 바랍니다.




[다음 호 예고] "입어봤으면 사야지, 어딜 그냥 가!"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90년대 백화점의 풍경. 고객에게 호통을 치던 판매 사원과 '복숭아 가게'식 경영이 판치던 그 시절, 우리는 도대체 어떤 옷을 어떻게 사고팔았을까요? 30년 전 패션 현장의 민낯, 그 생생한 기록 속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