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멋내기 기술, 그 지독하고 우아한 '탐미 '

할머니의 머리카락 뭉치에서 기모노의 붉은 섀도까지

by 유수연

"우리가 선망하는 하이엔드의 시작은 어쩌면, 오래된 기억 속 할머니의 화장대 위에 놓여있던 머리카락 뭉치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머리카락을 왜 모으지?


아주 오래전, 내 기억 속 할머니에게는 기괴한 습관이 하나 있었다. 빗질을 하든 방청소를 하든, 당신의 몸에서 빠져나온 머리카락을 하나하나 정성껏 모아 뭉쳐두는 것이었다.


할머니의 화장대 한구석에 고이 모셔져 있던 그 검고 푸석한 머리카락 뭉치는 어린 내 눈에 기괴하다 못해 조금은 섬뜩하기까지 했다. ‘왜 저런 것을 모으시는 걸까.’ 물어보지 못한 의문은 할머니가 돌아가심과 동시에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수십 년 만에 풀린 할머니의 습관


그 의문이 풀린 건 뜻밖에도 얼마 전 열린 ‘한일축제 한마당’에서였다. 일본 전통 메이크업과 정식 기모노 헤어스타일 시연 행사를 지켜보던 나는 순간 깨달았다.


볼륨감 넘치는 전통 머리를 완성하기 위해, 밋밋한 뒷머리나 정수리에 인조 머리카락 뭉치를 넣어 형태를 잡는 과정을 보던 중이였다.

아, 그랬구나. 높게 솟은 머리 위에 화려한 장식을 꽂기 위해선 견고한 지지대가 필요했을 터다. 할머니가 모으던 그 머리카락 뭉치는 다름 아닌 당신의 젊음을 지탱해주던 ‘헤어 소품’이었구나....


현대의 ‘뽕핀’이나 가발이 대신할 수 없는, 가장 원초적이고 지혜로운 볼륨의 기술. 수십 년 전 할머니의 화장대와 일본의 전통 미용법이 내 머릿속에서 비로소 하나로 연결되었다.


눈가의 붉은 꽃, 중년의 요염함으로 피어나다


헤어스타일에 이어 시선을 사로잡은 건 정통 기모노를 완성하는 전통 메이크업, 바로 '붉은색 섀도'였다. 눈매 끝에 빨갛게 포인트를 주는 이 기법은 본래 일본에서 게이샤 수업을 받는 어린 ‘마이코’들의 전통적인 방식이다.

붉은색은 악을 물리친다는 의미이자, 하얀 얼굴 위에서 꽃처럼 피어나는 고혹적인 장식이다. 재미있는 것은 10대나 20대의 전유물일 법한 이 과감한 붉은 섀도를, 정식 기모노를 품격 있게 차려입은 중년 여성들이 눈가에 자연스럽게 얹고 있었다는 점이다.

처음엔 당혹스러웠지만, 설명을 듣고 나니 곧 묘한 부러움이 밀려왔다. 그들에게 이 화장은 ‘상식’을 넘어선 ‘전통’이자 자기만의 ‘풍류’였다. 기모노라는 완벽한 무대 위에서라면 나이가 무색하게 가장 요염한 꽃이 될 수 있다는 그 당당함이 참으로 근사해 보였다.


패션에 상식과 비상식은 없다


행사가 끝난 후, 그들은 한껏 부풀린 일본식 전통 머리에 정성스레 갖춰 입은 기모노 차림으로 게다 소리를 내며 명동 한복판을 활보했다.

그 풍경을 보고 있자니 문득 교토에서 마주쳤던 광경이 겹쳐졌다.


기품 있는 기모노를 차려입고 정숙하게 지하철에 앉아 있던 일본의 젊은 여성들. 일상의 공간인 지하철 안에서 마주한 그들의 모습은 지극히 비현실적이면서도 기묘하게 아름다웠다.


서울 도심에서 기모노를 보며 묘한 부러움이 스친 건 무엇 때문이었을까. 패션과 메이크업은 순간을 즐기는 놀이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 나라의 정신을 담는 정교한 그릇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사람들 역시 한복을 입고 세계로 나갈 때, 그저 가벼운 코스튬이나 약식 차림이 아니라 우리만의 전통과 기품을 지키는 고급스러운 안목을 함께 담아냈으면 좋겠다. 100년 후, 우리 후손들이 지금의 우리를 기억할 때 '가장 우리다운 아름다움'을 지켰던 세대로 추억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말이다.


결국 패션에 ‘상식’과 ‘비상식’의 경계란 없다. 할머니가 머리카락 뭉치를 그토록 소중히 모으던 그 마음과, 오늘날 눈가에 붉은 섀도를 얹고 자신을 표현하는 이들의 마음은 본질적으로 같다. 그것은 타인의 눈을 의식하는 속박에서 벗어나, 지금 이 순간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가장 극적으로 향유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조금 더 아름다워 보이고 싶은, 이 찰나의 순간을 흥미진진하게 살아가고 싶은 인간의 순수한 욕망.

나는 그 호기심을 안고, 오늘도 이 변화무쌍한 패션의 세계를 즐겁게 들여다 본다. I love Fash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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