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젊음을 흉내 내지 않아도 좋다
요즘 부쩍 '즐겁게 나이 먹는 법'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문득 오래전 읽었던 어느 책 한 권이 떠오른다.
갱년기를 지나 쉰의 고개를 넘던 저자의 소망은 '명랑 할멈'이 되는 것이었다.
그녀의 일상은 매일이 축제였다. 살아있으니 한 잔, 아들 장가보내니 두 잔, 손주가 생겼으니 석 잔.
눈이 어두워지니 더는 책을 안 봐도 되어 좋고, 에스트로겐의 지배에서 벗어나니 남녀를 의식할 필요 없어 편하단다.
무릎이 시큰거리는 몸을 이끌고 자이브와 살사, 차차차를 섭렵하며 '밤무대의 여왕'을 꿈꾸는 그녀의 실버 예찬은 가히 독보적이었다.
하지만 책장을 덮으며 나는 묘한 피로감을 느꼈다. 매 순간이 감격시대여야 하고, 매일 파티의 명분을 찾아내야 하는 그 열정이 내게는 원인 모를 '조증'처럼 낯설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푼수 하면, 나 역시 한 '푼수' 하는 성격이지만, 그런 막무가내식 명랑함은 왠지 내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버거웠다.
사실 요즘의 실버 세대는 그 어느 때보다 당당하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신체와 정신을 젊은 날의 어느 지점에 고정해 둔 이들이 많다.
화장품부터 패션까지 요즘 노년의 파워는 실로 대단하다. 철저한 자기 관리와 여유로운 재력을 갖춘 그들을 보며, 이제 노년은 '애련함'의 대상이 아닌 젊은이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얼마 전 성황리에 끝난 실버들의 패션쇼가 그 단면을 보여준다.
근대 유럽 왕족들의 파티와 극장식 물랑루즈를 연상케한 랑유 김정아 패션쇼.
'지구를 살리자'는 슬로건하에 기빙플러스'와 함께 한 자선쇼 형식으로
실버모델 86명이 동원된 메머드급 규모의
드레스 군단이 무대에 올랐다.
벨벳. 레이스, 가죽, 모피, 티아라...
블랙을 중심으로 한 레드와 화이트
원색의 포인트컬러의 넘치는 화려함들이
패션의 춘삼월 호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뭔가 높고, 거창하며 함부로 손에 잡히지 않았던 시대의
화려한 꾸뛰르의 꿈. 과장된 골져스(gorgeous).
현실과는 거리가 먼, 꿈같은 룩들이지만
그립고 그리운 패션의 원형들이다.
컬렉션이 아닌만큼 어려울것도 없고, 쉬울것도 없는,
딱 지금의 실버층이 떠올릴 수 있는
패션의 그 이미지.
실버 브랜드, 실버 모델, 실버 디자이너들이 만드는 신문화.
자선쇼봤는데 영화 한판 본 기분이다.
흘러간 그 시절. 그순간들
패션이 진짜 패션으로 군림했었던 시대의 오뜨꾸뛰르를 추억하게 하는.
이날, 출연한 실버모델들의 후원금과 수익금은 기빙플러스에 기부되어 가장 낮고 소외된 계층의 그림자에 닿을 예정이란다.
이처럼 과거 어느 시절의 익숙한 음악과 익숙한 옷차림 속에서 자신들만의 문화를 되감기하고 향유하고 있는 모습들은 오늘날의 풍요로움을 나타낸다.
사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외로운 일이다.
취향은 섬세해지고, 자연의 소리나 건초 냄새, 어린 시절의 익숙한 감촉처럼 깊고 은은한 것들을 그리워하게 된다.
수 세대를 거친 앤틱 가구의 '흔들리지 않는 아름다움'에 비로소 눈을 뜨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장은 여전히 젊은 층에만 집중되어 있다.
갈 곳 잃은 실버 세대가 젊은이들의 마켓을 기웃거리는 모습은 어딘가 안타깝다.
우리가 독자적이고 고급스러운 실버 문화를 갖지 못한 것은, 어쩌면 격동의 역사 속에서 전통을 지탱해 줄 품격 있는 문화의 뿌리가 단절되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런의미에서 연륜이 말해주는 깊이, 진짜를 알아보는 안목은 결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미의식은 단순히 젊음을 흉내 낸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성보다 깊은 곳에 자리 잡은 '감각'의 영역이고, 수많은 실패와 경험, 삶에 대한 정성이 차곡차곡 쌓여 만들어지는 지혜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유럽의 귀족 교육이 ‘젊었을 때부터 피로서 다듬어지는 것’이라 했듯, 노년의 품격 또한 오랜 시간 정제된 결과물이어야 한다.
젊음에 대한 미련에 매달려 20대의 옷장을 기웃거리거나 무리한 성형과 다이어트에 집착하는 모습은 우스꽝스럽다.
진정으로 멋지게 늙는다는 것은 젊음을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제 나이에 걸맞은 독자적인 감각을 갖추는 일이 아닐까
나는 오늘도 막무가내식 '명랑 할멈'보다는, 세월의 풍파를 견뎌낸 진짜를 알아볼 줄 아는 '안목 있는 노년'을 꿈꾼다.
굳이 젊음을 흉내 내지 않아도 그 자체로 빛이 나는, 연륜이라는 이름의 가치를 누리며 말이다.
#실버세대 #통찰 #에세이 #노년 #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