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은 왜 블랙에 집착하는가?

우리가 블랙에 매료될 수밖에 없는 이유, 1997년 취재 수첩의 기록들

by 유수연

최근 뉴스를 보다 보니 흥미로운 대목이 눈에 띈다.


한국을 찾은 외국인들이 공통으로 느끼는 한국인의 첫인상이 ‘블랙 일색’의 패션이라는 것이다. 이건 사실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특히 아침 출근길, 지하철역을 가득 메운 직장인들의 모습은 블랙 패딩과 코트가 만드는 거대한 물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왜 이토록 블랙에 질리지 않을까?

블랙은 누군가에겐 세탁을 미뤄도 티가 나지 않는 ‘귀차니즘의 구원’이겠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둥글게 변한 몸을 슬림하게 보정해 주는 마법이며, 누군가에게는 이보다 명확하고 시크할 수 없는 최고의 전략이기 때문일 것이다.


트렌드의 공식은 깨졌지만, 블랙은 영원하다


과거 패션계에는 엘레강스와 캐주얼이 10년 주기로 바뀐다는 암묵적인 공식이 있었다. 우아함이 강조되던 엘레강스의 시대에 블랙 포멀 슈트는 결코 빠질 수 없는 패션의 바이블이었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다. 포멀웨어는 세력을 잃었고, 캐주얼과 기능성 웨어가 일상의 표준이 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여기서 발생한다. 트렌드의 공식은 깨졌지만, 블랙의 지배력은 오히려 공고해진 것이다. 한때 격식의 상징이었던 블랙이 이제 가장 편안한 기능성 웨어의 얼굴을 한 채, 우리에게 가장 사랑받으면서도 실은 가장 부담 없는 컬러로 고착되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진보다 선명한 기록들


책상 깊숙한 곳에서 1997년의 취재 기록을 꺼내 보았다. 블랙이 유독 섹시하게 피어오르던 98 SS 컬렉션에 대한 정리들이 빼곡하다. 사진들은 아마 낡은 CD 안에 잠들어 있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내 최첨단 컴퓨터는 이제 아날로그를 읽어낼 줄 모른다.


CD 리딩기가 없음을 잠시 아쉬워하다 생각했다. 잠겨버린 사진 대신, 더 선명한 기억과 글을 옮겨보기로 한다.



성실과 도덕, 혹은 공포의 이름, 블랙


이전의 블랙은 고통과 죽음, 혹은 엄격한 미덕의 상징이었다. 중세 성당의 신부와 승려, 유럽 귀족의 가정교사, 18세기 암스테르담의 다이아몬드 상인과 르네상스의 병사들... 그리고 미망인의 이름 곁을 지키던 어둡고 무거운 컬러였다. 때로는 공포스럽기까지 했던 이 어둠의 컬러는 19세기에 들어서서야 은행원들이 자신의 성실함과 정확성을 강조하는 '신뢰의 색'으로 조금씩 빛을 보기 시작했다.


파괴적 변신, 레이 가와쿠보의 반란


이 침울한 블랙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어 부르주아 패션의 주역으로 격상시킨 이는 가브리엘 샤넬이었다. 20년대의 어느 밤, 극장 발코니석에서 형형색색 화려한 드레스와 깃털 장식에 파묻힌 귀부인들을 관찰하던 그녀는 이렇게 선언했다.

"머지않아 이들에게 모두 검은색을 입혀 보이겠다."


그렇게 탄생한 샤넬의 최초 검정 드레스, '쁘띠뜨 로브 노와르(Little Black Dress)'는 블랙의 운명을 바꿨다. 블랙은 더 이상 종교인과 미망인의 제복이 아니었다. 전 세계 여성의 개성을 신비롭게 감싸는 세련미와 심플함의 상징, '파리지엔느'의 전설이 시작된 것이다.


파괴와 파격으로 거듭된 변신


80년대에 이르러 블랙은 또 한 번의 파격적인 변신을 겪는다. 꼼데가르송의 레이 가와쿠보는 82년 AW 파리컬렉션에서 '디스트로이(Destroy)' 룩을 통해 기존의 우아한 블랙에 조종을 울렸다. 당시 모델들은 구멍 난 니트와 비대칭으로 찢어진 듯한 검은 옷을 입고 등장했고, 파리의 비평가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꼼데갸르송의 레이가와쿠보 82년 Aw컬렉션 '디스트로이(Destroy)' 룩


당시 파리 패션계는 이를 '히로시마 시크(Hiroshima Chic)'라 부르기까지 했다.

전쟁의 비극을 패션용어로 표현하다니...

지금 같으면 논란의 여지가 많을 표현이지만, 그만큼 기존 패션의 질서를 완전히 전복시킨 블랙의 파괴적인 힘을 증명한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됐다.


이러한 전위적 정신은 2015년 AW 파리컬렉션에서 다시 '관(Coffin)' 컬렉션으로 이어지며, 삶과 죽음조차 예술로 승화시킨 블랙의 위엄을 다시 한번 각인시켰다.


90년대, 엘레강스의 주역으로 부활


90년대 스트리트 캐주얼의 영향으로 잠시 주춤하는 듯했던 블랙은 98 SS 시즌 '엘레강스의 부활'과 함께 다시 날아올랐다. 당시 블랙의 표정은 경이로웠다. 가죽, 스트레치 울, 데님, 나일론, 실크 시폰...


소재에 따라 블랙은 때로는 금욕적으로, 때로는 성숙한 여인의 체취가 느껴질 만큼 섹시하게 변화했고, BCBG의 드레스부터 DKNY의 에나멜 드레스까지, 블랙은 주연 배우로서의 위엄을 잃지 않았다.


신비한 '천의 얼굴'로 군림하다


프랑스의 쁘랭땅 백화점은 블랙의 아이디어를 스타들의 이름에 투영하기도 했다. 에디뜨 피아프, 브리짓 바르도, 오드리 헵번...


그들의 이름이 붙은 블랙 아이템들은 블랙이 발상만 풍부하다면 어떤 표정도 담아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로맨틱에서 전위까지, 도발에서 허무(Nihilism)까지. 이제 블랙은 금욕의 상징을 넘어 성숙한 여성의 색향(色香)을 떠올리게 하는 섹시함까지 품게 되었다. 블랙은 진정 이 시대가 추구하는 천의 얼굴을 가진 신비의 컬러다.


오늘 아침 당신이 입은 그 블랙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습니까?

저는 3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기록을 들춰보며 생각합니다.

시선은 여전히 하이엔드에 머물되, 이토록 풍요로운 블랙의 변주 속에 흐르고 있는 우리의 일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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