핫 초콜릿 마시면서 되돌아본 나의 2022년
2022년 12월의 어느 날, 나는 지금 저지시티에 있는 작은 카페에 있다. (참고로 저지시티는 뉴저지 남동쪽에 붙어있는 도시이다. 한 정거장만 건너면 맨해튼이다. 나는 브루클린 4년, 맨해튼 1년 거주 후 현재 뉴저지에서 6개월 정도 사는 중이다. 이후에 미국에서의 이사일지를 써 볼 예정이다.) 재택근무 덕분에 노트북만 있으면 어디서든 일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프로젝트가 조용해진 틈을 타서 2022년을 마무하는 글을 쓴다.
나의 올해를 관통하는 2가지 키워드는 [확장]과 [확신]이다.
확장. 커리어적으로 나는 많은 확장과 성장을 이뤄냈다. 상반기에 1년 정도 다닌 첫 풀타임 회사에서 이직을 했다. 그 이후에 정말 많은 일이 일어났고 결과적으로 현재 한 테크회사에서 풀타임 컨트랙으로 일을 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이 얼마나 많은 취업과 이직, 그리고 커리어적 성장 가능성을 지녔는지 알게 되었다. 또 한 나에게 주어진 기회 또한 무궁무진하나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복잡 다난했지만 어찌 됐든 나의 [확장]을 한 셈이다.
확신. 여러 이벤트와 에피소드가 있었던 커리어와 별개로 나의 개인적인 삶은 부드럽게 정제되었고, 큰 안정감 속에서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스튜디오에서 자취를 하며, 내가 나의 공간을 깨끗하게 유지하고 정신적으로 평온하게 혼자 지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족들과의 가족여행을 통해 다시 한번 큰 사랑을 느꼈다. 맘이 통하는 친구들과 더 가까워지고, 어떤 관계와는 적정한 거리를 두며 나의 인간관계를 정리했다. 무엇보다 나의 남자친구가 나의 정서적 안전기지가 되었다. (나도 남자친구에게 평온한 안전기지가 되었으면 싶다!) 미국에서 내가 독립적으로 내 삶을 운용할 수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이제 월별로 나의 2022년을 이야기해 보겠다.
이사한 지 6개월 된 나의 첫 자취집이다. 룸메이트들 없이 살면 외로울까 봐 걱정했는데, 나는 혼자 사는 것이 꽤 적성이 맞는 걸로 판명이 났다. 10평 남짓하게 작지만 옷장이 크고, 아파트의 위치가 무척이나 좋았던 곳이었다. 처음으로 타지에서 혼자 지내는 겨울이었다.
그리고 이때 이직준비를 했다. 막 어플라이를 하려고 마음먹은 순간, 링크드인에서 잡 인터뷰 오퍼가 왔다. 큰 펀드회사였다. 어렵지 않은 몇 번의 인터뷰 후 너무 쉽게 오퍼를 받았다.
작은 디자인 에이전시에서 나름 미국에서 큰 펀드 회사 중 하나로 이직이 결정되나 마음이 평온해졌다. 편한 마음으로 보스턴에 갔다. 2박 3일이 짧은 일정이었지만, 뉴욕을 벗어나 혼자 또 새로운 곳에 있으니 기분이 새로웠다. 가자마자 마사지를 받고, 호텔에서 하루종일 누워서 넷플릭스를 봤다. 이걸 왜 굳이 보스턴까지 비행기 타고 하냐고 묻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힐링이니까..". 그래도 둘째 날에는 유명 카페도 가고, 아쿠아리움도 가고, 쇼핑센터도 갔다. 저녁에는 지쳐서 오이스터바에서 굴을 잔뜩 테이크아웃해서 호텔로 갔다. 난 역시 움집을 지은 호모 사피엔스의 후손이다.
기억이 약간 섞였는데, 나는 첫 번째 잡 오퍼를 뒤로하고 다시 어플라이를 시작했다. 경력을 1년 겨우 채운 나로서는 펀드회사의 디지털 디자이너( uxui 업무가 80프로, 이메일이나 마케팅포스트 같은 디지털 잡무 20프로.)로 가는 것이 좀 아쉬웠다. 그래서 첫 번째 디자인 에이전시보다 규모가 더 큰 에이전시 위주로 어플라이를 했다.
고맙게도 평소에 눈여겨본 2개의 에이전시에서 잡오퍼를 받았다. 그중 위치가 집에서 더 가깝고, 연봉을 맞춰준 (한 곳은 너무 낮은 연봉을 제시했다.) 곳으로 선택했다.
일주일 정도의 휴식 후, 바로 두 번째 직장으로 출근했다. 브라이언트 파크 옆에 있는 디자인 에이전시였다. 50명 이상의 직원들이 있는 꽤 큰 에이전시였다. 설렘 가득한 첫 출근날에 찍은 사진이다. (혼자 일찍 가서 아무도 없음) 하지만 처음 들어간 클라이언트가 너무 까다로웠다. 또한 그 프로젝트에서 내가 맡은 역할이 내가 기대한 것이 아니었다. 분명 나는 프로덕트 디자이너로서 UXUI 업무만을 원했고, 그렇게 입사계약서를 썼다. 하지만 실제로 3월에 한 첫 업무들은 광고디자인, 이메일을 포함한 마케팅디자인 업무였다. 아직 한 달밖에 안 됐으니 기다려봐야 하나? 원래 중소 에이전시에서는 원하는 것 직무만 할 수 없나? 고민이 많아졌던 3월이었다.
별개로 3월은 남자친구 생일과 1주년 기념일이 있는 사랑의 달이다. 항상 너무나 다정하고 사랑 가득한 남자친구를 위해 선물을 준비하는 것이 참 즐거웠다.
4월은 뉴욕이 예쁘다. 새로 알게 된 친구들과 같이 카페도 가고 밥도 먹고 친해졌다. 차를 빌려 남자친구와 외각의 미술관에 다녀왔다.
업무는 여전히 광고와 마케팅 디자인뿐이었다. 회사에서는 고민이 많았다. 그렇다고 다시 이직을 하기엔 너무 일렀고 지쳤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사장님에게 내가 가진 걱정을 알리는 것이었다. 사장님은 곧 나에게 꼭 맞는 업무를 준다고 했다. 그렇게 반포기를 하고 있던 중에 또 링크드인으로 연락이 왔다. 드림회사 중 하나인 테크회사에서 디자이너를 뽑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내 현재 상황을 공유했다. "이제 막 이직했고, 회사에서 나의 비자를 스폰해주기로 하고 서류를 준비하는 첫 단계." 그러자 리쿠르터는 "최대한 빨리 인터뷰를 잡겠다"라고 말했다.
인터뷰가 정말 빠르게 진행되었다. 바로 첫 번째 인터뷰를 보고 두 번째 인터뷰를 이틀 후에 봤다. 이주일만에 나는 오퍼를 받았다.
비자까지 스폰해주기로 한 신입사원의 이직은 사장님들에게 충격이었을 것이다. 입사한 지 두 달이 조금 넘은 시점이었다. 하지만 드림컴퍼니의 제안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난 미국에 단지 생존하러 온 것이 아니라, 경험하기 위해 왔다. 나는 큰 물에서 더 큰 세상을 경험하고 싶었다. 당연히 2주 노티스를 줬고, 진행된 변호사비용을 전부 처리하고 나왔다.
미국은 At will employment 계약이다. 회사도 언제든 직원을 해고할 수 있고, 직원 또한 언제든 떠날 수 있다. 그만큼 고용이 자유로운 나라이다. 도의적으로 어긋난 결정은 아니었지만, 이른 퇴사는 역시 마음이 불편했다. 하지만 5월은 이렇게 씁쓸하게만 지나가면 안 된다. 내 생일이 있으니까! 마이애미에서 세상 즐겁고 따뜻하고 맛있는 생일을 맞이했다.
이 날 너무 더웠다. 더워서 입맛이 없는 바람에 전날 저녁을 안 먹고, 점심은 간단히 만두를 몇 개 먹었다. 오전에 물 마시는 것을 까먹고 남자친구를 만나러 첼시마켓 근처의 스타벅스에 갔다. 그리고 기절했다. 다행히 남자친구 만나자마자 기절해서 (남자친구한테 트라우마를 준 것 같아서 진짜 미안하다) 응급실에 이송됐다. 별 이상은 없었고 탈수에 열사병이 섞여서 잠시 기절한 것 같았다. 앰뷸런스와 병원비 200만 원을 내고 정신을 바짝 차렸다. 건강이 재산이다. 하지만 첫 앰뷸런스, 첫 응급실, 새로운 경험 흥미로웠다. 그래도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더운 날에는 물을 자주 마시기로 마음먹었다.
맨해튼 스튜디오는 2022년 6월에 1년 계약이 만료되었다. 나는 새롭게 뉴저지의 저지시티로 이사했다. 그런데 이사 전부터 몸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래서 "새집이 너무 고층이라 나랑 안 맞나?"라고 생각했다. 이사한 후에야 코로나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첫 코로나였다. 열이 펄펄 나고 한 달 내내 기침을 했다. 더운 여름, 잦은 이직, 정신없는 이사, 그리고 코로나. 나에게 무척 큰 스트레스였던 7월이었다. 다행히 남자친구가 옆에서 극진히 간호해줘서 잘 회복할 수 있었다.
뉴저지의 두 번째 스튜디오 자취방에서 재택근무를 시작했다. 뉴저지 이사 오는 날부터 나는 왜 그렇게 더럽고 시끄러운 뉴욕이 그리운 걸까? 난 역시 대도시에서 집순이로 살아갈 운명인가 보다. 지금 이 글 쓰는 순간에도 뉴욕 가고 싶다. 하지만 시간이 나도 주중에는 귀찮아서 지하철 타고 한 정거장 절대 안 가게 된다. 대신 주말마다 꼬박꼬박 놀러 간다.
8월쯤 세 번째 회사에서 프로젝트에 투입되었다. 엄청난 부담감과 스트레스가 있었다. 이 큰 테크회사에서 적응할 수 있을까? 내 실력이 모자라지 않을까? 내가 원하는 업무일까?
다행히 빠르게 적응했다.
일도 적당히 익숙해져 갔다. 틈을 내서 시카고 여행을 갔다. 피자는 역시 뉴욕의 씬피자가 최고다. 남자친구가 대학을 다니며 지냈던 추억 많은 곳에 가게 되어서 좋았다.
추석에는 역시 티비 보면서 만두 빚어야 한다. 이때쯤 환승연애에 빠져서 매주말 남자친구랑 환승연애를 봤다. 나의 가을을 즐겁게 해 줘서 고맙다고 편지라도 써야 할 것 같다.
사실 살기에는 저지시티 좋다. 안전하고 조용하고 맨해튼과 가깝고, 뉴욕시티보다 택스도 훨씬 낫다. 그럼에도 맨해튼으로 가고 싶은 이유는 나의 영혼이 무척 심심해한다. 상대적으로 뉴저지는 즐길거리가 부족하다. 로컬 음식점도 아쉽고, 쇼핑, 문화, 예술 모두 부족하다. 그러려면 맨해튼으로 나가야 하는데, 아직 젊은 나는 이 즐거움의 소용돌이에서 살고 싶다.
누군가가 나보고 어떻게 뉴욕에서 씩씩하게 잘 지낼 수 있는지 물어본다면, 나는 이 모든 힘은 부모님들의 헌신과 사랑에서 왔다고 할 것이다. 내가 실수하고 실패해도 언제나 나의 편이 되어주고 내 옆에 있어주리라는 강한 믿음이 나를 강하게 만든다. 이제는 경제적으로도 독립하여 먼 미국에서 살고 있지만, 나는 그 끈을 느낄 수 있다. 부모님에게 받은 사랑과 보호 안에서 나는 어른이 될 수 있었다.
외국인 노동자로 미국에 있으면서 나는 항상 방랑자였고 마이너리티였다. 이것을 올 한 해 나는 강하게 깨달았다. "집"이 없기 때문에 계속해서 이사했다. "평생직장"이 없어서 계속해서 이직했다. "영주권"이 없어서 비자로 고민이 많았다. 난 미국 땅 위에 안착하지 못한 방랑자였다.
하지만 나는 그냥 그저 그런 떠돌이가 아니었다. 나는 아직 꽃피지 않은 작은 씨앗이다. 거센 바람은 날 힘들게 하지만, 내가 멀리 날아갈 수 있게 도와준다. 어두운 밤은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꿈꾸게 하고, 뜨거운 햇빛은 내가 지치지 않게 힘이 되어준다. 나는 이 방랑 속에서 생의 힘을 느낀다.
올 한 해 수많은 변화와 도전들이 있었다. 그 방향성은 대체로 정착할 수 있는 땅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안다. 내가 하물며 어딘가에 정착한들, 나는 내 안의 씨앗을 잊지 않을 것이다. 이 씨앗이 어딘가에 자리 잡아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을 지켜보고 싶다. 그리고 다시 씨앗이 되어 날아가는 순간까지.
올 한 해 얻은 많은 에너지로, 내년에도 씨앗은 열심히 날아다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