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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선 Feb 20. 2021

.마사키를 만난 날.

히라노 게이치로 '달'

히라노 게이치로의 '달'이라는 책이 있다.

1897년 메이지 중기 초여름, 젊은 시인 마사키가 여행을 떠난 곳에서의 신비하고 아름다운, 그래서 슬프고 아픈 이야기.


어떤 책은 결말이, 그 책의 좋고 나쁨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을 때가 있다. 

좋아하는 자리에 앉아 책을 펴고, 주변은 소리를 잃고 단절되며 시작되는 읽기의 과정은, 난해하거나 이해되지 않은 결말을 향해 혹 갈지라도 그것이 전혀 상관이 없을 만큼, 읽기의 과정이 다인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읽는 내내 날 부르는 책이었다. 많은 것들이 명확하지 않고 분명하지 않은, 이곳이 이승의 세계인지 저승의 세계인지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이 어려운 그곳에서, 마사키는 그의 사랑 다카코를 찾아 헤맸고 난 그런 마사키가 안타까워 그의 뒤를 쫓았다.


"마사키는 미목 수려한 청년이었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어딘가 묘한 아름다움이었다. 이를테면 회화나 조각 등의 예술에서 악마며 아수라라 하는 류들이 특별히 아름답게 표현되는 일이 있다. 신이나 제석천 같은 숭고한 존재에 대항하고 있는 힘에 의해 본래의 추함과 더러움이 깨끗이 씻겨나가고, 출중하게 매력 넘치는 모습을 온몸에 휘감고 나타나는 것이다. 마사키의 아름다움은, 그런 아름다움이었다.” 히라노게이치로, 『달』, 문학동네,1999.


추함과 더러움이 씻겨나간 마사키의 말간 얼굴. 하지만 결국에는 드러나 보일 그 속은 또 얼마나 아름다울까 생각했다.

그러니까 난, 그의 출중한 얼굴에 빠져 그를 쫓게 된 것이다.


"마사키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 '정열'의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숙명적인 병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 병은, '참으로 살아 있다'는 감각을 위해서는, 찬찬히 나날을 쌓아가며 그 끝에 무언가 얻기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순간적 초월, 지속적이지 않은 단 하나의 순수한 앙양, 일격에 생의 모든 것을 때려 부수고 뒤 한번 안 돌아볼 치열한 충동의 체험을 갈구했다. 피는, 끓는 물처럼 소용돌이치지 않으면 금세 괴어 색이 변하고 응고하고 만다. 육신은, 고통스럽도록 거세게 움직이지 않으면 곧 뜨뜻미지근한 권태의 나락에 가라앉는다.

'정열'은 뜨겁게 녹아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한 덩이 유리이다. 그것을 생활에 쓰고자 한다면, 거기에 세상의 범용한 형태를 부여하고, 만만하게 손으로 만질 수 있도록 식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식어버린 유리에 남겨진 빛은 가냘프기 짝이 없다. 이윽고 그 빛마저도 잃고 손때에 흐릿해져 가서 마침내는 일상의 너무도 무의미한 순간에 뜻하지 않게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버리는 것이다.

마사키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렇다고 어떤 형태로 자신의 정열을 성취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각오는 되어 있었다. 그러나 열정을 따르기에는, 마사키는 지나치게 지적이었다.

'정열'이 행동에 연결되는 순간, 마사키는 그때마다 내밀었던 손을 다시 거두어들이고 한 걸음 물러서서, 바로 지금 자신이 만지려 한 곳을 바라보고 만다. 그리고 궁리하는 것이다. 참으로 만져볼 가치가 있는 것인지, 만진 뒤의 일은 어떨지, 만지지 않았을 경우엔 어떨지, 그러는 동안에 '정열'은 시시각각 식어간다. 형태를 이루지 못한 채 식어가는 것이다. 차라리 사라져 버린다면 좋았으리라. 그러나 허망하게도 '정열'이 있던 그 자리에는 반드시 둔중하기 짝이 없는 추괴한 덩어리가 남고 마는 것이다. 마사키는 그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 둔중한 무게를 견딜 수 없었다. 히라노게이치로, 『달』, 문학동네,1999.


그때 난, 마사키가 말하는 정열의 감각을 정확히 이해하고 보았다. 한 글자 한 글자 읽어 내려갈 때마다 정열의 감각이 쌓여가 황금빛 유리 덩어리를 만들고 있는 것처럼.

‘정열’은 누구나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정열’의 감각을 아는 건 다르다. 

그래서 어떤 이는, 그것을 궁리하거나 살펴보지 않고 가치가 없는 곳에 써버리고는 그것이 정열이었다는 것도 잊은 채 살아간다. 그리고는 도대체 왜 자신에게는 남들과 같은 정열이 없는지에 대해 실망을 한다. 

또 어떤 이는 그것을 성실에 기대어 더 좋은 것으로 보기 좋은 것으로 쓰려한다. 그사이 정열은 간데 없어지고, 그저 유려하기만 한 성실과 시간의 결과물이 만들어진다. 그럴듯해 보이나 반짝임은 찾아볼 수 없다.

두려웠다. 정열의 감각은 있다. 마사키가 느끼는 정열에 대한 감각을 이해한다. 

하지만, 그것을 꼭 써야 하나. 쓰는 법을 알지 못하고, 아무리 봐도 이걸 현명히 사용할 것 같지 않다. 감각만 활활히 타올라 마음이 따가워 아프고 두려웠고, 써보지도 못한 추괴한 덩어리의 둔중한 무게가 벌써부터 느껴지는 것 같았다. 


궁리하지 않은 채 쓴 것보다 세월에 기대어 써버린 것보다 더 어리석고 허망한, 고여있는 정열의 감각이었다. 




20대 초반의 나는, 새싹이 파랗게 돋아나는 봄철 같은 청춘을 도무지 보내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정열의 감각만 가지고 있는 따끔한 마음으로, 어두운 곳을 차가운 곳을 지치지도 않고 찾아다녔으니.

많은 날들 중의 어느 여름날. 친구와 인사동에서 만난 그날, 마사키를 만났다. 무슨 책 속의 인물이 판타지 영화나 드라마처럼 현실에 나타났느냐고, 장소는 하필 인사동이야. 

뭐 청춘이 다 봄은 아닐 터이니, 지독히 앓고 있던 그 시절, 환각과도 같은 하루 중의 하나였겠지 말해도. 빤빤히 말하련다. 아무려면 어떠냐고. 나에게는 지극히 개인적인 그리고 자연스러웠던 마사키와의 만남이었다고.


파스타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이제 인사동에서 먹을 데라고는 이 집 밖에 없는 것 같다 라는 말을 하며. 

그리고는 친구의 지인이 전시를 하고 있다는 갤러리에 갔다. 왜 똑같은 그림을 여러 점 보고 있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다른 그림이기에 각기 다른 곳에 걸려 있는 게 당연할 텐데, 내 눈에는 다 똑같아 보였다. 열심히 한 그림 한 그림 볼 때마다 감상을 이야기하는 친구에게, 너의 감상은 그냥 너의 감상으로, 속으로 끝냈으면 좋겠다 말했고, 금방 미안해진 민망한 마음에 윈도를 보았을 때, 길을 걷고 있는 마사키를 보았다. 말간 얼굴의 마사키를.

친구에게 잠깐이라고 말했는지 나갔다 온다고 말을 했는지, 그대로 갤러리를 나와 마사키가 간 길을 쫓았다. 사랑하는 다카코를 찾아 헤매는 그가 안타까워 글을 통해 당신의 뒤를 그토록 쫓았는데 지금 난 현실에서, 두 발로, 당신을 쫓고 있다. 고동색 챙 넓은 벙거지 모자를 쓰고 린넨 소재 위아래 옅은 베이지색 셔츠와 바지를 입고 등에는, 봇짐과 같이 보이는 천으로 된 배낭을 메고 있다. 점점 거리가 가까워지고 뛰어가 잡을까 마사키라 이름을 불러볼까 하는 사이, 눈물이 나올 것 같아 눈을 질끈 한 번 감았고 그는 갑자기 몸을 돌려 어느 작은 갤러리에 들어갔다. 

따라 들어갈 수 없었다. 밖에서 그의 모습을 보았다. 움직이지 않고 한 그림만 오랫동안 보고 있다. 얼굴을 보아도 정확한 생김이 보이지 않는다. 그저 말간 얼굴이다. 지금 당신의 얼굴은 추함과 더러움이 씻긴 얼굴인가. 아니면 그 속의 얼굴도 그렇게 말갛단 말인가. 

다카코를 보는 눈으로 그는 그림을 보고 난 그런 그를 본다.


그가 나온다. 문을 열고 나오는 마사키와 창에 붙어 그를 보던 내가 한 지점에서 마주친다. ‘순간’이다 ‘찰나’다. 내가 그의 눈을 본 건. 그가 나를 본 건.

알 수 없어졌다. 당신은 마사키인가. 여기는 그런 달이 뜨는 세상이 아닌데. 

그런 세상이 아닌 곳에서 당신을 만나버렸으니, 비로소 내 정열을 당신이 말하는 순간적 초월, 지속적이지 않은 단 하나의 순수한 앙양, 생의 모든 것을 때려 부수고 뒤 한 번 안 돌아볼 치열한 충동의 체험을 갈구해야 하는가.


날 지나쳐 사라질 줄 알았다. 헛것처럼 사라질 줄 알았다. 사라지길 바랬다. 그냥 헛것처럼 지금 내 눈 앞에서 사.라.져 줬으면. 했다. 


마사키는 인사동 끝길까지 작정을 한 듯 사라지지 않고 걸어간다. 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오른쪽으로 조금 더 걸어가고 더 이상 마사키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당신을 쫓던 나는 아직 그 창문에 기대어 걸어가는 당신을 사라질 때까지 바라본다.


‘정열’은 아직 남아 있는가. 그걸 쓰지 않았는데. 두려워 머뭇거리기만 할 뿐이었는데. 그새 식어버렸나. 모양은 그대로일까. 

그런데 당신. 당신은 나의 ‘정열’이었나.


다시 친구를 만났고, 친구는 어디를 다녀왔는지 묻지 않은 채 그림에 대한 감상을 다시 떠든다. 이번에는 아무 말없이 친구의 말을 듣는다. 좀 전과 똑같은 감상평을 말하는 친구의 목소리에 마음이 편해진다. 

그가 간 갤러리에 들어가 오래도록 보던 그림을 보고 싶다. 조금만 더 가면 그 갤러리가 나오지만 가.지. 않.는.다.


인사동을 나와 광화문을 걷는다. 여름밤, 진하게 가라앉은 나무 냄새가 나고 친구는 그 지인을 확실히 마음에 둔 듯 아직도 그림 이야기를 하고 나는 웃고 있는 이곳은, 마사키 당.신. 세.상.의 달이 뜨지 않는, 내.가. 사.는. 세상의 ‘달’이 뜨는 곳이다. 




누구에게도 말을 한 적은 없었다. 소중한 시간이었고, 공유할 수 없는 감정이었으니.

왜인지 다시 마사키가 생각났고 지금에 와서 정열의 감각을 말하는 건 어렵다 생각했다.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잠깐 그날을 떠올리고 들어가 다시 나오면 되는 일이다. 

왜 이렇게 간단한 일이 되어버린 걸까. 조금 인생을 살았다고 황금빛 유리 덩어리를 이리저리 굴려가며 쓰는 법을 알아버린 걸까. 평안인가. 자유인가. 둔중한 무게도 느껴지지 않는다. 아니면 아직도 인생은 갈 길이 멀어 지나가고 있는 중인가. 초월, 찰나의 그 순간을 향하여?. 

 

아무렴 어때, 좋아하는 말을 하며, 어쩌면 이렇게도 그날의 마사키가 선명히 그려짐에 감사하다.

잠깐 마주쳤던 그 시선을 떠올리니 저릿하다. 

따갑고 아렸던 내 청춘도 함께 떠오르며. 햇살에도 몸이 아리던 내 청춘. 

아무리 어둡고 추운 곳을 찾아 헤매었어도 아름다운 봄 날이었다. 

당연히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알 수 있는. 

온몸과 마음의 감각이 휘몰아쳐 활활히 지배하던, 아마 정열은 나도 모르는 새에 그렇게 그 시절을 나와 함께 했나 보다. 그래서 이 마음에 어떤 둔중한 무게도 느껴지지 않는 걸까.

그 시절을 용케 견뎠고, 그 시절을 황금빛 유리 덩어리로 채웠으니.



마사키 당신은 아직도 다카코를 찾아 헤매는가. 난 이제 당신이 안타까워 뒤를 쫓지는 않는데.


그런데 안타까운 건... 

당신인가...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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