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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지 Dec 23. 2022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결코 혐오스럽지 않고 사랑스러웠던 <마츠코>

이 영화는 '사랑'이라는 인간 근원적인 감정을 받고 자라지 못해 결국 자신의 인생을 자기 자신이 망가뜨리는 마츠코만의 잔혹 동화이다. 첫 장면이 결국 죽게 된 마츠코의 인생을 파헤치게 되면서 시작을 하는데, 행복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었던 그녀가 사회와 단절하고 사랑에 실패하고 인생에도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어린 시절부터 아픈 동생을 간호하느라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한 결과로 애정결핍이 생겨서 아버지의 감정을 곧 나의 감정이라고 생각하는 미분화 현상이 일어났다. 심리적으로 독립하지 못했으며 어린 시절 아빠의 관심을 받기 위해 노력하지만 결국 그런 관심 끌기가 먹히지 않게 되자 자신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간다. 결국 사랑받고 싶었던 마음과 다른 사람을 해치고 싶지 않던 결국 나쁜 제자까지 감싸고자 하여서 돈을 훔친 제자를 무작정 제자 대신 자신이 훔쳤다고 자신을 희생하고 학생 대신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쓰게 되며 인생 전반이 무너지게 된다.​


애정결핍의 문제는 보통 사춘기 시절 문제 양상이 드러나지만 마츠코는 결국 자신의 직업을 갖고 난 이후 문제가 표면 위에 드러나게 되었다. 결국 남자친구에게 가정폭력을 당하게 되고 남자는 당사자의 분노를 마츠코에게 풀지만 애정전선에 있어서 항상 약자일 수밖에 없는 마츠코는 결코 피학가학적 관계를 끊어낼 수 없었다. 애정을 거부할 수 없어 화를 내지 못하고 매달리게 돠는 실상이다. 몸을 팔고 다니는 것도 자신의 정서적 허기짐을 옆에 두고 집착하는 것이나, 육체적 관계로 풀려는 자신만의 생존 방식인 것이다.​

결국 자신의 욕구를 해소한 남자는 자신의 방식대로 이별을 요청하고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불안정 애착으로 관계에서의 상호작용 방식을 다른 남자친구와의 관계에서 끊임없이 되풀이한다. 결국 애인이 떠날 때면 자신의 존재가 박살 난 것만큼의 상실감을 느끼게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애정을 나누는 타인을 곧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나와 타인의 구별 체계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곧 타인이 원하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결국 온전한 사랑의 형태를 경험하지 못한 채 결국 실패의 사랑만 하게 되고,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안정적으로 사람을 신뢰하는 관계를 맺지 못하고 배신만 당하는 삶을 살게 된다. 결국 몸을 팔아서라도 다른 사람을 만족시키고 즐겁게 하고 깊은 유대감을 느끼게 되는데 그것이 자신의 허기짐을 달랠 수 있는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몸을 팔아서 모은 돈을 남자친구에게 받쳤지만 자신이 사랑하게 된 여자를 주었다고 하자 화가 난 나머지 남자를 죽이고 자신도 자살을 하려고 하는 모습을 보였다. 사랑에 실패하고 삶에 실패를 하게 되었을 때 절망감에 모든 인생의 절망스러운 장면들이 하얗게 오버랩되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집안에서 벗어나고 싶고 좋은 사랑의 기억을 만들고 싶었다는 마츠코가 결국 자신의 인생이 모두 실패같이 느껴지자 극단적인 언행을 하게 된 것이다. 결국 마츠코는 건강한 관계를 이어가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어릴 때 동화 같은 세상을 꿈꿨던 자신이지만 결국 인생이란 제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 투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백조가 되고 싶었는데 까마귀가 되어있다거나 한 번만 살 수 있는 인생인데 왜 이렇게 되었을까 자책하는 마츠코, 결국 마츠코는 지나치게 정직하게 사랑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자신이 사랑하게 된 사람에게는 순정을 받쳐 사랑하고 충성하지만 마츠코의 애정결핍이 보이는 타인의 입장에서는 끊임없이 그런 순정과 정직함을 이용하려고 한다. 결국 마츠코는 미련한 사랑을 한 것이다. ​


친구관계에서 결국 자신이 회피하고 물어지는 것도 결국 사랑에 불행한 부분을 익숙한 듯 쫒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사람을 너무 믿는 점, 사랑을 할 때 자신의 간과 쓸개를 다 빼서 주는 것, 자신의 비밀을 너무 말하고 다니는 것 자신의 외로움을 어떻게든 외부에서 충족하려고 한다. 마츠코는 사랑을 위해서 자신을 지우고 온전히 타인을 위해서 타인이 원하는 인생을 살아냈다. 아무리 배신당해도 외로운 것보다는 낫다는 자막과, 맞는 장면이 나오면서도 더할 나위 행복하다는 자막과 장면이 대조를 이루면서 굉장히 충격적인 연출 장면이 되었다.


결국 자신의 인생에 아무도 들어오게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아무 사람과도 소통하지 않고 히키코모리로 지내게 된다. 결국 사람들은 아무와도 교류하지 않는 마츠코는 이상한 취급을 받게 된다. 사랑의 실패 경험이 결국 마음의 문을 닫게 만들었다는 것이 매우 안타까웠다. 결국 마츠코의 아픔은 다른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발현되었고 결국 충동적이고 극단적인 행동은 다른 사람들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 결국 사랑도 인생도 모두 실패로 끝난 것이다.​

비록 극 중에서 마츠코는 철저하게 불행했지만 사랑을 하는 순간만큼은 진솔하고 진심을 다했기 때문에 사랑하는 순간에는 정말 순수하고 누군가를 조건 없이 사랑했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그 사랑이 자신을 향하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을 언제나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것이 마츠코의 인생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츠코처럼 누군가를 순수하게 좋아하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감독이 맑은 동화 같은 OST 그런 상황에 대조되는 연출기법을 자주 사용했는데 그로 인해 비극성을 강조되게 하는 부분이 뛰어나다고 생각했다. 마지막 상상 속 회상씬에 마츠코가 아무런 표정을 짓지 않아도 아버지는 웃어주고 시기의 대상이었던 동생한테 타다이마라고 하고 집으로 들어가는 연출이 너무 좋다. 아마 이것이 근본적으로 마츠코가 꿈꾸던 사랑의 형태가 아니었을까.


사랑을 받고 싶어서 시작한 관계가 사랑으로 인해 모두 파국으로 치닫게 되었을 때, 마츠코는 인생을 잃은 것만큼 절망스러웠다. '사랑'이 필요하다, 이렇게 정직하고 순수하게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에게 더 멋진 사랑, 건강한 사랑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 필요했다. 난 결코 마츠코의 인생이 '혐오스럽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사랑이 필요했던 한 아이였다, 마츠코는 사랑을 받을 줄은 모르는 아이였지만, 최소한 사랑을 줄 줄은 아는 아이였다는 데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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