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에게 특정 서사를 부여하는 이유
이 영화는 단계적으로, 다층적으로 서서히 인간성의 몰락과 사회지위적 몰락을 드러내며 사회라는 구조 속에서 어쩔 수가 없었던 이 인물을 자세히 조명한다. 사회 병리적 현상을 연구하던 학파의 라벨이라는 학자가 일탈 행동을 '낙인'이라고 이름 붙이듯, 단계적 몰락을 기준으로 제시한다. 사회가 어떤 사람을 특정 방식으로 규정하며 규정당한 본인은 사회적으로 어떠해야 하는 도덕적 기준을 넘어선다. 그렇게 인간으로서의 가치가 바닥까지 찍게 된 주인공 만수의 서사는 결국 고전 이론으로 이해해 볼 수 있을 만큼 본질적인 요소이며, 아직은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가 사회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사회 안에서 능동적인 인물일 수밖에 없다는 어쩔 수 없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영화의 본질
영화감독은 넓은 시야를 가져야 하며 뛰어난 직관으로 관객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를 2시간 안에 스크린 속의 인물들의 표정과 대사에 녹여 들도록 해야 하며, 그 사이에서 선정적이지 않으면서 교훈점을 시사해야 한다. 박찬욱 감독의 <어쩔 수가 없다>는 창의성과 실용성을 동시에 영화 안에 감각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나는 상업예술인 영화에서는 창의성보다는 실용적 요소[보편적으로 사회에서 일어나는]가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이유는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감독의 예술의 향연을 기대하면서 보는 예술인이 아니라 실용 차원의 어떤 자신의 일상의 모습을 겸비한 자신의 욕구나 인생의 메시지를 간접적으로 표출하는 실용주의적 요소를 더더욱 익숙하게 여기고 선호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박찬욱 감독은 실용성이 돋보이는 주제의식 바탕에 창의적인 요소를 깔아 감각적으로 연출하고 영화를 조명한다.
박찬욱 감독은 예술적인 요소인 '창의성' 또한 겸비해 민감하고 헌신적인 존재인 유만수라는 가장의 모습을 다각적으로 묘사한다. 민감하고 헌신적인 존재인 가장을 중심으로 영화의 서사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관객은 결국 현실에서의 억압을 가장의 시점에서 바라보게 된다. 현실에서의 억압이 행동을 야기했고 그 행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어쩔 수가 없다>라는 영화의 제목에서 드러나는 의미를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하는데 사회 구조속에 억눌려 생긴 경제적 몰락과 결핍에서 우러나오는 화를 행동으로 옮길 때 우리는 합리화하듯 '어쩔 수가 없다'라고 방어적으로 말하기 때문이다.
권고사직 당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AI 모델링 때문이라는 것 또한 흥미로웠는데 원작과는 다르게 감독이 현대사회의 흐름을 반영하고 차용하고자 하는 요소였기에 인상 깊었다. 이러한 회사 구조조정에 의해 해고당하게 된 주인공이 자신의 삶을 되찾으려고 경쟁자들을 제거하는 모습과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교차되는데 블랙코미디 같은 심연의 불편함을 자극하며 관객은 극에 몰입하게 된다. 아무것도 되지 않는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맥없이 회사를 그만둬야 하는 유만수가 능동적으로 할 수 있는 행위는 무엇도 아닌 경쟁자를 제거하는 것이자 곧 살인이라고 생각하게 할 수 있게 된 것은 삶의 무게와, 성과 중심의 사회에 억눌려있는 분노의 억압이 극심했는지를 보여준다.
영화적 허용과 개연성의 차원에서의 줄다리기
어떤 관객은 구직활동이 어렵다는 이유로 다른 경쟁자들을 살인한 것이 과연 '어쩔 수가 없다'며 정당화될 수 있는 요소가 되냐는 궁금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살인'이라는 비도덕적인 방식을 사용하면서까지 얻고자 했던 것은 가장으로서의 무게와 자신의 삶에 대한 안정이었다. 스펙 중심, 성과 중심의 사회에서 돈과 자본의 중요성은 극대화되어가고 있고 한 가정의 가장이 직장을 잃은 것, 이 사회에 짓눌리고 망가진 사람이 얼마나 더욱 망가져갈 수 있는지를 스크린이라는 간접적 매체를 통해 관객들에게 시사한다. 구직활동을 못하자 처음에는 괜찮다고 말하던 아내와 아이들 또한 점점 망가져 가며, 삶이 점점 구차하게 느껴지던 만수가 그런 살인이라는 방식을 차용하게 되는 그 '과정'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용인 가능한 범위 내에서 관객들의 공감을 자아내게 하기 위해 영화는 살인을 계획하면서도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인 인물을 동정하는 인간적인 모습 또한 드러낸다. 또 영화는 본인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주인공에게 개연성을 부여하기도 하지만 어떻게 살인이라는 행위를 정당화하지 않으면서 인간의 성공과 실패라는 관점을 어떤 격차로 조명할 것인지, 허용과 절제를 위한 줄다리기를 계속 시도한 셈이다.
경쟁자들을 제거하고 재취업하게 된 만수가 일을 하면 할수록 숲은 제지활동에 의해 점점 텅 빈 모습이 드러나게 되는데 그 장면을 통해 만수의 범죄가 드러나게 됨을 암시한다. 결국 살인이라는 요소는 캐릭터성을 위한 장치라기보다는 해고의 무게와 도끼로 찍어내리고 도려내는 듯한 통증과 아픔을 가진 사람이 정신적으로 망가지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장치라고 볼 수 있고 그에 따라 관객들이 영화에서 사회에 느끼는 바를 능동적으로 꺼내고 사고하도록 하도록 돕는 방식인 것이다.
영화의 묘미
창작물이 흥할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이 외부 상황에 휘둘리는 한없이 연약한 존재임과 동시에 더 나은 사회와 성장에 주목하는 강한 존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간접적으로나 비유적으로나 우리의 삶이나 인생을 대변해서 바라보고자 하는 욕구가 있으며 그것을 충족시켜 주는 것이 바로 영화이다. 영화는 시각적인 자극과 정신적인 영역의 상생을 도와준다. 사람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때로는 즐거움과 때로는 수치, 슬픔이라는 다양한 감정을 꺼내오는데 그것이 개개인의 역사적인 인생 경험에 따라 모두가 다르다는 것이 흥미로운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할 수 있는 창작물인 '영화'는 매력 있고 신통방통한 묘미인 것이다.
가치판단을 하지 않고서는 보이지 않는 유무형의 계급과 체계는 차용하기 좋은 소재이다. 그것에 의한 사회에서의 몰락과 실패는 영화에서 사회를 풍자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 사회적 요소나 해고가 담고 있는 어떠한 상징적인 의미는 신체적 가학보다 더한 분노를 자아낸다. 만약 만수가 '경제적 어려움'만을 범죄의 이유로 꼽았다면 살인 이외에 다양한 방법을 고안했을 것이다. 비상식적인 방향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가족들의 무언의 압박과 사회가 규정한 어떠한 틀 안에 존재하는 안정감의 부재와 실패자라고 낙인찍는 부가적인 요소가 만수의 행동에 더욱 가속도를 붙였던 것이다. 자신의 삶을 '해고당하기 전'으로 되돌려야만 했던 만수의 강박의 단초는 무엇이었을까? 정서적 원인을 갖고 드러내야 하는 영화 산업 종사자들은 이 부분에 주목한다.
개개인의 인생은 하나의 역사와 같이 복잡하고 깊은데 그런 사람들이 보면서 공감할 수 있는 방법은 영화에 공통요소를 가미하는 것이다. '사람'이라는 동류가 느끼는 생물학적이나 본능적 욕구를 자극하는 방법과, '사회'라는 틀 안에서 우리가 응당 그렇다고 생각하는 보편적인 요소와 체계들을 자극하는 것이다. 그런 공통점을 비유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감독 개인은 그 사람들의 모든 것을 대변하게 된다. 그 공통 메시지가 가능하면 공감 가도록, 웬만하면 선하도록 한다. 그것이 영화인의 덕목이자 우리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간접 요소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