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5장

영적 제사

by yukkomi


안식과 제사



히브리서 5장은 우연히 제사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히브리서 4장에서 던진 ‘안식’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으로, 의도적으로 제사와 제사장을 끌어온다.
죄는 사람의 마음에 무거운 짐을 지운다.
죄책감과 불안은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하게 만들고, 그 결과 인간은 쉬지 못한다.
그래서 죄는 안식을 방해하는 가장 근본적인 요소가 된다.
구약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이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셨다.
인간이 죄의 짐을 스스로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아시고 제사법을 주셨다.
구약의 제사는 죄를 완전히 제거하는 제도라기보다, 죄로 인해 무너지는 인간을 잠시나마 쉬게 해 주는 장치였다.
죄의 짐을 잠시 내려놓게 하시는 하나님의 배려였다.
히브리서는 우리의 안식을 위해 예수님이 직접 제물이 되셨고, 동시에 대제사장이 되셨다고 말한다.
예수 안에서의 안식은 깨어졌던 관계가 회복되면서 주어지는 안식이다.
십자가로 인해 예수님과 하나 된 인간은 죄로 분리되었던 하나님과 다시 연결되었고, 안식은 이미 주어진 상태가 되었다.
그래서 히브리서 4장에서는
“안식에 들어가라”라고 말하고,
히브리서 5장에서는
‘어떻게 그 안식에 들어가는지’에 답한다.
그 답은
완전한 제사장이자 완전한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완전한 제사


“예수님이 대제사장이고, 예수님이 제물이다.”
이 말은 교회를 다니며 수없이 들어왔다.
그러나 그 개념을 암기했을 뿐, 제대로 이해한 적은 없었다.
마치 역사를 외우기는 했지만 그 역사에 담긴 의미는 모른 채 주입식 교육을 받은 사람처럼 말이다.
히브리서는 제사법에 익숙하고, 대제사장의 역할을 알고, 속죄 제사가 무엇인지 아는 유대인 개종자들에게 쓰인 편지다.
당시에 안팎으로 시험이 닥치자 연약한 신자들은 다시 익숙한 율법으로 돌아가려 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들에게 익숙한 제사 제도와 예수님을 대비시키며 구약의 모든 제사가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었음을 설명한다.



흠 없는 제물 예수 그리스도


구약의 제사는 양과 소, 염소, 새와 같은 동물이 제물이었다.
그러나 히브리서 저자는 동물 제사의 한계를 분명히 짚는다.
동물의 피로는 행위에서 나온 ‘죄악’은 사할 수 있어도 ‘죄성’ 자체를 끝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죄는 단순히 규칙을 어긴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훼손된 자유의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동물도 선택은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 순종할지 불순종할지를 결정하는 자유의지는 없다.
자유의지가 없는 존재의 죽음은 인간의 죄악을 대신할 수는 있어도 인간의 죄성을 대표할 수는 없다.
또 , 죄가 있는 죄인이 다른 죄인을 구원할 수는 없다.
그래서 죄 없으신 예수님이 인간으로 오셨고,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지신 채 스스로 제물이 되셨다.


단번의 제사


구약의 제사로는 죄성을 제거하지 못했기에 죄도 제사도 반복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사는 죄성을 제하는 제사이기에 단번에, 완전하게 이루어졌다.
구약의 제사가 죄의 열매만 떨어뜨리는 제사였다면, 예수님의 제사는 죄의 뿌리를 제거하는 제사이며 생명에 뿌리내리게 하는 제사다.



제사장의 혈통


예수님의 대제사장직 역시 스스로 취한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위임하신 자리였다.
혈통을 중시하던 유대인들에게 목수의 아들 예수님이 대제사장이라는 사실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이 아론의 혈통이 아니라 영적 제사장인 멜기세덱의 계보를 따른다고 말한다.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빌어 준 자이다
이는 예수님의 제사장직이 아브라함보다 권위 있고, 모세의 율법보다 더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순종의 제사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히브리서 5:8–9)


이 말씀은 예수님이 불순종했다가 순종을 배우셨다는 뜻이 아니다.
순종은 하나님과의 연합을 의미하고, 불순종은 분리를 의미한다.
예수님은 언제나 순종이셨기에 고난을 받아야 할 이유도 없는 분이셨다.
인간은 자유의지로 불순종을 선택했지만
예수님은 자유의지로 그 인간을 용서하기로 선택하셨다.
하나님의 사랑의 뜻에 기꺼이 순종하심으로
인간의 고난 한가운데로 직접 걸어 들어오셨다.
말로만 구원하지 않으시고 삶의 한복판으로 들어오셨다.
죄에 묶인 인간들을 보며 눈물로 기도하시고, 아파하시고, 그리고 죄의 짐을 스스로 감당하시고, 묵묵히 죽으셨다.

흔히들 싸울 때 말한다.
“이 싸움은 누군가 죽어야 끝난다”라고.
이 말은 인간의 노력과 의지로는
멈출 수 없는 죄의 지독함을 말해준다.
예수님은 그 죄의 고리를 자기 생명을 내어줌으로
끊으셨다.


자유의지의 회복


예수님의 생명을 영접한다는 것은 단순히 죄 사함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유의지가 회복되는 과정이다.
이 회복은 에덴의 아담 수준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 용서와 인내이신 아버지의 자유의지와 하나 되어 가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는 반드시 고난이 따른다.
긴 고난의 시간은 죄의 습관이 벗겨지는 시간이자 자유의지가 자라나는 시간이다.
이 회복은 자동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받아야 자라고, 관계의 시간 속에서 자란다.
부모의 사랑을 받고자란 아이에게 부모의 열매가 맺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자유의지의 회복은 단번의 완성이 아니라
지속적인 성장의 과정이다.


성숙


생명은 가르침으로 전해지지 않는다.
성경이 반복해서
“누가 누구를 낳았는지”를 기록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의 씨를 받은 사람만이 하나님의 열매를 맺는다.
죄가 깨달음으로 해결되지 않고 죽음으로 해결되듯, 생명 역시 가르침이 아니라 생명으로 전해진다.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히브리서 5:13–14)


그리고, 생명으로 태어난 사람은 어린아이 수준에 머물지 않는다.
더딘 것처럼 보여도
반드시 자라고, 열매 맺는다.



나의 삶에서


이 모든 것을 이론적으로 이해하고
동의한다고 해서 곧바로 평안을 누릴 수 있을까?
나는 영접 후에도 오랫동안 평안이 없어서 괴로워했고,
믿어지지 않아 울부짖으며 긴 고난의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어느 날,
내 안에 하늘의 평안이 임해 있음을 발견했다.
상황이 좋아진 것도 아니고 불안이 사라진 것도 아닌데, 상황과 상관없는 평안이 주어져 있었다.
그리고 아빠 품에 안겨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러나 100%의 평안은 아니다.
여전히 히브리서 성도들처럼 내 안에도 어린아이 수준에 머물러 있는 부분들이 있다.
불안도, 자책도, 비교도 많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자기가 잘 자라고 있는지 걱정하지 않는다.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가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날 수 있을까” 고민하지 않는다.
부모가 밥을 주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는다.
큰 강아지를 보고 울었다고 자책하지 않는다.
그저 아이의 성장에 맞게 젖을 주고, 이유식을 주고, 단단한 음식을 주는 부모의 밥상을 받고 자란다.
슬프면 부모에게 달려가 울고, 겁나면 ‘아빠’를 부른다.
그렇게 수많은 시간과 사건 속에서 아이는 자연스럽게 부모를 닮아간다.

그러니 어린 내가 할 일은
부모의 사랑에 꼭 붙어 자라는 것,
부모의 손을 놓지 않는 것,
부모가 먹여주는 밥을 감사함으로 먹는 것임을
오늘도 깨닫는다.
왜냐하면 나는 내 성장을 잘 보지는 못해도,
이미 생명의 선배들이 죽음에서 나와 평안을 누리는 과정을 보았고, 익어가는 과정을 보았으며 그 열매를 분명히 맛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명의 동생들이 나와 똑같은 길을 가고 있음을 본다.
나 역시 같은 씨를 받았으니 같은 열매를 맺으리라는 것을 믿는다.






매거진의 이전글히브리서 3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