닻과 휘장
죄는 단순히 잘못된 행동을 뜻하지 않는다.
죄란 어리석은 인간이 스스로 왕이 되어 살려고 하면서 안식이 무너진 상태, 평화가 깨진 ‘존재의 상태’다.
하나님 없이 스스로 살아가려 할 때
인간의 내면에서는 끊임없는 전쟁이 벌어진다.
비교와 불안, 두려움과 자기 보호가 쉼 없이 충돌하고 그 안에서 죄악은 자연스럽게 생산된다.
겉으로는 아무 일 없어 보여도
속에서는 늘 에너지가 소모되고 갈등이 계속된다. 그래서 평안과 평화가 없는 상태이다.
“우리보다 앞서 가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먼저 그 휘장 안에 들어가셔서
멜기세덱의 계열에 속한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히브리서 6:20)
성막의 지성소는 하나님의 완전한 안식과 보호하심을 뜻한다.
그리고 그 앞에 드리워진 휘장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단절,
인간이 그 안식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존재의 상태를 보여준다.
성소에 있는 물두멍에서 몸을 씻고 번제단에서 제물을 태워도 인간 존재 안에 깊이 뿌리내린 죄성 때문에 휘장을 통과해 하나님 안에서 쉬는 자리까지는 이를 수 없었다.
죄를 가진 인간을 대표해 대제사장들이 속죄를 위해 지성소에 들어갔지만 그곳은 안식의 자리가 아니라 두려움의 자리였다.
행위로 드러난 죄는 씻을 수 있었지만
존재의 상태는 여전히 불안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성소 안에 계셔야 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스스로 휘장을 찢고 나오셨다.
이 말은 종교적 절차가 쉬워졌다는 뜻이 아니다.
죄로 인해 가려졌던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 자체가 회복되었다는 뜻, 이제 인간이 하나님 안에서 쉴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다.
그 사실이 믿어지면 쉼을 누리지만
믿지 못하면 여전히 누리지 못한다.
이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광야 여정과 닮아 있다.
이집트를 나온 것은 분명 구원이었다.
그리고 목적지는 가나안이었다. 약속이 있었다.
그러나 430년간의 노예 생활은
그들의 마음속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끝없는 불신과 두려움이 그들을 지배했다.
자유가 주어졌지만 자유를 누리는 법을 몰랐다.
힘들면 다시 종살이하던 애굽을 그리워했고
하나님의 보호가 있었지만 믿음은 좀처럼 자라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안식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함으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히브리서 3:19)
가나안은 단순히 죽어서 가는 천국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가나안은 회복된 존재로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삶이다.
서로를 믿고 사랑하며 안식하는 삶이다.
죄와 하나 되어 자라난 거짓 자아가 아니라,
창조 때의 ‘나’로 살아가는 상태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도 인간은 여전히 약속을 믿지 못한다.
그래서 이미 주어진 평안을 누리지 못한다.
이것이 노력으로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애써 믿으려고 애쓰면 믿어지고,
결심하면 안식에 들어갈 수 있다면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은 노력으로 되지 않는다.
믿음은 은혜의 선물이며, 거듭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생명의 상태다.
거듭남이란 예수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나님과 완전한 사랑과 믿음으로 하나 되어 계신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시는 것이다.
그래서 내 믿음이 온전하지 않아도 나와 하나 되신 예수님 때문에 나도 점점 약속이 믿어지는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이다.
열심히 종교 생활을 한다고, 진리를 많이 안다고 믿어지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영접할 때 비로소 믿어지기 시작한다.
영접한 사람에게도
완전한 안식과 평안이 단번에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광야의 시간이 필요하다.
광야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쌓이는 시간이자,
유전자와 경험 속에 켜켜이 맺힌 노예의 근성과 불신, 두려움이 빠져나가는 시간이다.
광야는 사람을 죽이는 시간이 아니다.사람을 살리기 위해 거짓 믿음을 벗겨 내는 시간이다.
노예근성을 걷어 내고,죄의 습성을 벗기며,
처음 창조하신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가 서로 사랑하고 누리며 사는 자녀의 삶을 회복하는 시간이다.
그러나 구약의 광야와는 다르다.
이제는 각자 속에 예수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에 약속을 믿으며 간다.
"우리가 가진 이 희망은
영혼의 닻과 같아서 튼튼하고 안전하여
휘장 안에 있는 지성소에 들어갑니다.”
(히브리서 6:19)
이 닻은 나의 어떠함에 내려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내려진다.
휘장 안, 지성소에 내려진다.
그 약속은 목숨의 충만에 대한 약속이 아니라, 생명의 충만에 대한 약속이다. 안식에 대한 약속이다.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안식과 평안과 하나 됨을
자녀에게 반드시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배가 닻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닻이 배를 붙잡는다.
약속의 땅을 향해 항해하는 배가 폭풍과 파도 속에서도 방향을 잃지 않도록 닻은 우리에게 안정감을 준다.
그리고 이 닻은 매이는 닻이 아니라 자유한 닻이다.
놀이공원에서 정신이 팔린 어린아이의 팔을 놓지 않는 부모의 손과 같다.
하늘을 나는 연이 자유롭게 날아다니지만
얼레에 끈이 연결되어 있듯, 아버지의 손은
우리를 얽매는 것이 아니라 안전하게 붙잡아 주신다.
예전에는 히브리서의 말씀이 하나도 이해되지 않았다.
단어와 문장으로만 남아 있었다.
안정감과 안식을 누려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회개해도, 아무리 방언을 해도,
아무리 말씀을 공부해도 내 안에는 안식이 없었다.
말씀을 알면 알수록 내가 잘못 알고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이 커졌고, 묵상을 할수록 괜찮게 살고 있다고 믿었던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이 드러나 있던 평안마저 깨지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완전하지는 않지만 분명히 안식을 누리고 있다.
그 이유는 단 하나다.
내가 예수님을 ‘이해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내 아빠'로 영접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자녀로 산다.
아빠에게 도움을 구하고 감정을 쏟아 놓고
실패한 채로 돌아가 안길 수 있는 관계 안에 있다.
그리고 예수님의 지혜가 나를 깨닫게 한다.
예수님과 살고 경험해 보니 이제야 히브리서의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게 되었다.
전에는 진리의 길을 찾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헤매는 시간이 참 많았다. 하지만 점점 길을 잃었다.
이제는 알겠다.
아빠가 내 길 속에 들어와 주심으로 내가 가는 길 자체가 아빠의 길이 되었다는 것을.
아빠의 뜻은 자녀가 아빠의 보호 안에서 행복하길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사랑하면서 살길 바라신다는 것을...
앞으로 남은 인생의 항로에서 폭풍우도 만나고 파도도 만나 휘청이겠지만 그때마다 나는 알게 될 것이다.
내가 아빠를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빠의 든든한 손이 나를 붙잡고 계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