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7장

제사 공동체와 예배 공동체

by yukkomi


이 당시 히브리계 기독교인들은 구원받아서 유대교에서 벗어나 기독교로 개종했지만, 아직 유대교 전통에서 완전히 분리된 상태는 아니었다.
그들은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으로 옮겨졌지만, 여전히 그 자녀 됨을 누리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항상 지내던 제사를 더 이상 지내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에게 엄청난 불안이었을 것이다.
익숙한 습관을 멈춘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분명히 말한다.
율법의 모든 제사는 완전한 제사를 예표한 그림자였고, 예수님으로 드려진 제사만이 완전한 제사이며, 예수 안에서 이미 제사를 드린 사람은 더 이상 반복적인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다고.

제사에는 목적이 있고, 내용과 형식이 필요하다.
예수님은 완전한 제사의 목적을 이루시고 스스로 형식이 되어 주셨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
예수님은 형식적인 관계가 아니라 사랑의 관계, 서로 알기를 원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관계를 맺기 위해 지성소의 휘장을 찢고 우리 안에 오셨다.
예수님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리라”(요 2:19)고 말씀하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친히 새로운 성전이 되어 주셨다. 히브리서가 기록되고 나서 얼마 후 실제로 예루살렘 성전은 무너졌다. 더 이상 제사 장소가 필요 없어진 것이다.

동물의 피와 살로 드려지던 제사는 끝나고,
예수님은 자신의 피와 살을 나누는 성찬을 통해
당신이 완전한 제물이 되셨음을 선포하셨다.
(마 26:26~28)

이제 이 산에서도, 저 산에서도 드리던 제사는 끝나고,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의 시대가 시작되었다.(요 4:21)
여기서 말하는 ‘신령’은 하나님의 영, 즉 생명이다.
어떤 신비한 상태나 감정의 흥분 상태가 아니라,
죄를 이기고 죽음을 통과한 새로운 영,
곧 예수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 존재의 상태를 말한다.
‘진정’은 진심이나 태도의 문제가 아니라,
그 예배가 누구를 향하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다.
예배에서 ‘누가 누구를 만나느냐’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더 이상 죄 사함을 받는 예배가 아니라 생명으로 태어난 사람들이 진리이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죄 사함에 대한 제사는 한 번에 끝났다.
그래서 예배는 더 이상 제사의 시간이 아니라,
만남의 시간이며 코이노니아의 시간이다.

이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생명을 받고 기존의 예배에 대해서 왠지 모르게 너무나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생명을 잘 알지도 못했는데도 율법적인 설교를 듣는 것이 엄청 괴로웠다.
하지만, 얼마 후 아이들이 언젠가부터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고 했을 때 엄청난 불안을 느꼈다.
‘교회라도 다녀야 할 텐데…’라는 생각 때문에 마음이 더욱 무거웠다.
예배라도 드려야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구원받았다는 증표라는 나의 깊이 숨겨졌던 가치관이 다 드러났던 시간인 것 같다.
그런데 얼마 후 성전이 무너진 것처럼 실제 코로나로 예배를 드릴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리고 형식적인 예배를 안 나갈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아마 실제로도 헤롯의 성전이 무너졌을 때 히브리 출신 기독교인들도 제사로부터 훨씬 자유로워졌을 것 같다.

그러나, 현재 내가 예배를 드리는 이유는 전혀 다르다.
예배는 매주 지은 죄를 사함 받기 위해 드리는 제사가 아니다.
예배는 이미 완전한 죄 사함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난 사람들이
친아빠와 그동안의 삶을 나누며 형제자매들과 교제하는 시간이다.
코이노니아의 시간이고 관계가 더 깊어지는 시간이다.
생명을 받은 사람들은 모이라고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모이게 된다.
모이기에 힘쓰게 된다.
왜냐하면 만날수록 생명이 살아나고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서로서로 살리며 살도록 만드신 관계의 원형이기 때문에 생명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모이게 된다.
사실 우리는 생명을 받은 것 말고는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이전 같았으면 가치관도, 문화도, 세대도, 성별도 달라 절대 만나지 않았을 사람들이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는 함께 모인다.
예수님의 생명을 영접하기 전에는 아빠를 아빠라 부르지 못하고 임금님, 주인님처럼 어려워하며 만났던 우리가 이제는 친아빠로 만나고 있고,
전에는 남이었던 사람들이 형제자매로 만나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이 된다.
이전의 교회 생활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드러낼 수도 없었고, 그 모습이 받아들여진다고 느끼지도 못했다.
그래서 교회에 갈 때마다 가면을 쓰고 교회에 맞는 나의 모습을 장착해야 했다.
그러니 만남이 마냥 기쁠 수는 없었다.

나는 교회에서도 가정에서도 관계를 제대로 배워 본 적이 없었다. 때문에 편안한 관계를 맺고 사는 것이 아니라 양극단의 삶을 살았던 것 같다.
교회나 교인들의 모임에서는 종의 정체성으로 살거나 죄인의 신분으로 살았다.
집에서는 때로는 재판관으로 살며 정죄하고, 때로는 선교사라 생각하고 무리한 짐을 지며 살았다.
양극단의 이중적인 생활을 했다.

생명을 받으니 내 모습이 감추어지지 않고 다 드러난다.
아마도 누울 자리가 생기니까 자연스럽게 다리가 펴지는 것 같다.
하나님 앞에서도 벗지 못했던 나 자신이 드러나며, 형제자매 사이에서도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어쩔 수 없이 서로의 민낯이 드러난다.
관계 안에서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과정을 때로는 힘겹게 지나고 있고, 나도 모르던 내 모습을 의도치 않게 드러내는 시간을 지나가고 있다.
서로가 가면을 벗고 스스로도 몰랐던 두터운 겉치레를 벗는 시간을 함께 하느라 아프고도 어색한 시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교회에서 처음으로 진짜 관계를 배우며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가족이 되어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배우고, 이것이 다시 삶의 다른 영역으로 확장된다.

교회는 성도의 모임이다.
이 모임이 더 이상 제사의 장소가 아니라 아빠 하나님과 형제자매 가족들이 모이는 자리,
생명을 낳는 장소이자 그 생명을 서로 돌보아 주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정원임을 알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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