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의 피 vs 보혈의 피
가만히 생각해 보면,
구약의 제사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공급받는 시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병든 자유의지로 인해 끊임없이 죄를 생산해 내고 있었다.
죄의 짐을 지고, 죄책감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 하나님은 동물을 제물로 드리는 제사제도를 통해 인간을 용서하시고 죄책감에서 벗어나 다시 살아갈 수 있는 은혜를 주셨다.
동물이지만 자신이 기르던 깨끗하고 흠 없는 양은 얼마나 소중했을까?
그 양을 다치지 않게 조심스럽게 성전으로 가지고 와 제물로 바칠 때마다 인간은 다짐하고 또 다짐했을 것이다.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양심이 변질된 인간은 다시 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해결되지 않는 채 반복되는 죄 속에서, 인간의 양심은 점점 굳어 갔고 제사도 어느덧 형식으로만 남게 되었다.
굳어진 양심으로 인해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설사 겉으로 보이는 죄를 피한다 해도, 내면의 죄는 오히려 더 깊어졌다.
“율법은 앞으로 올 좋은 것들의 그림자일 뿐, 참된 모습은 아닙니다.
그래서 해마다 같은 제사를 계속 드려도,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들을 완전하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만일 완전하게 할 수 있었다면, 그 사람들은 이미 깨끗해져 더 이상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고 제사를 계속 드릴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히브리서 10:1–2)
성경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잠시의 순종 뒤에는 언제나 불순종이 뒤따라왔음을 볼 수 있다.
구약의 모든 역사는 결국 인간의 어떤 노력으로도
죄로부터 구원받을 수 없었음을 증언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완전한 제사를 준비하셨다.
예수라는 이름이 이것을 증언한다.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것이다.”
(마태복음 1:21)
동물의 피의 제사가 인간의 죄악을 덮는 일시적인 속죄제였다면, 예수님의 피의 제사는 인간의 모든 죄를 제거하여 완전한 구원에 이르게 하는 단번의 '속죄제'가 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염소나 송아지의 피가 아니라 자신의 피로 단 한 번 성소에 들어가셔서 영원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히브리서 9:12)
동시에 예수님의 피의 제사는 죄를 씻는 제사에 그치지 않고, 새 생명을 낳아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는 '화목제'가 되셨다.
“염소와 황소의 피가 몸을 깨끗하게 할 수 있다면,
하물며 그리스도의 피는 얼마나 더 큰 능력이 있겠습니까? 그 피는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여 죽은 행실에서 벗어나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합니다.”(히브리서 9:13–14,)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단절되었던 관계는 회복되었고,
모세의 할례로 옛 언약(구약)의 자녀가 되었듯,
예수님의 제사를 통해 우리는 새 언약(신약)의 자녀가 되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내가 맺을 새 언약은 이러하다.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 속에 기록하겠다."(히브리서 8:10)
이 모든 것은 태초부터 하나님의 완전한 계획 안에 있었던 일이었다. 구약의 제사는 신약의 제사의 모형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십자가 제사를 통해
인간을 더 이상 율법으로 관리해야 할 존재가 아니라 자녀로 키우기로 결정하셨다.
이제 하나님은 영접한 사람을 백성으로 대하지 않으시고, 피와 살을 물려받은 하나님의 혈육으로 대해 주신다.
하나님 스스로 부모가 되셔서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성령님의 돌보심 속에서,
예수님의 생명을 받아 다시 태어난 인간을
직접 키워 가시기 시작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제사의 효력은 영접을 통해 발휘된다
완전한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을 믿고 예수님의 영을 마음에 받아들이는 것이 ‘영접’이다.
그리고 영접한 사람에게는 씨앗으로 오신 새 생명이 자라도록 돕는 분으로 보혜사 성령님을 함께 보내 주신다.
그리고 죄를 비추고 녹이는 생명의 빛을 주신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에서 벗어나 깨끗해졌기 때문입니다.”(히브리서 10:19, 22, )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단지 죄의 짐에서 해방된 인간에 머무는 데 있지 않았다.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자라고,
그 생명을 다시 흘려보내는 사람,
곧 새 생명의 상속자를 만드는 데 있었다.
생명으로 자라나 생명을 낳고,
서로의 생명력으로 서로를 살리는 존재.
그것이 하나님이 처음부터 원하셨던 인간의 모습이었다.
이것은 단순히 죄 사함을 받은 상태,
양심이 회복되는 상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생명이 사람 안에서 실제로 자라나
존재의 성질 자체가 변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이로써 인간은 아담의 차원을 넘어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로 자유의지가 자라 가게 된다.
그렇다면 영접 후에 짓는 죄는 어떻게 되는가?
영접 후에도 죄의 지배하에 살아오던 습성들이 여전히 있다. 끝없는 불신, 불안, 정죄, 비교 그리고 그로부터 파생되는 죄..
하지만 이러한 자녀의 죄가 사랑 많은 부모의 사랑에 걸림돌이 되지는 않는다.
부모는 자녀의 죄를 정죄의 대상이 아니라 연약함으로 바라보며, 영원한 사랑 안에서 회복시킨다.
부모는 자녀를 비난하지 않으며,
관계 안에서 함께 걸어가며 고쳐 주고 바로잡아 준다.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사람을 훈련시키시고, 자녀로 받아들이신 사람을 돌보십니다.”(히브리서 12:6, )
때로는 빛으로 죄의 무게를 직면하게 하시고,
때로는 자신의 죄만 묵상하는 시점을
아름다운 약속의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점으로 바꾸어 주신다.
그 계속되는 과정 속에서 인간의 양심은 회복되고, 자유의지는 살아나 죄와 점점 멀어지는 삶으로 자라난다.
죄를 짓지 않기 위해 애쓰는 삶이 아니라,
생명의 아름다움에 이끌려 자유롭게 자라는 삶이 된다.
돌이켜보면 영접 이전의 나는
예배를 마치 구약의 제사처럼 드렸던 것 같다.
예배를 드리면 마음이 깨끗해지는 것 같았고,
은혜를 경험했기에 예배를 붙들었다.
그러나 그 은혜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그래서 모든 예배에 강박적으로 매달렸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내가 드리는 예배는 사귐을 위한 예배다.
하나님을, 다른 사람을 깊이 알아가는 예배다.
반복적으로 예배당에 머물지 않아도, 거룩을 흉내 내지 않아도 일상의 소소한 삶 자체가 예배가 된다.
예수님과의 깊은 사귐 속에서 내면은 변하고, 자유의지는 점점 예수님을 닮아간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항상 하나님께 찬양의 제사를 드립시다.
선을 행하고 서로 나누어 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런 제사를 기뻐하십니다.”
(히브리서 13:15–16,)
완전히 자유하지만
아름다운 사랑의 관계 안에서 자라나,
생명이 또 다른 생명을 낳는
삶의 예배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