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과를 오해했다.
7창세기 2:15-17 KLB
[15]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가 만든 사람을 에덴동산에 두어 그곳을 관리하며 지키게 하시고 [16]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동산에 있는 과일을 마음대로 먹을 수 있으나 [17] 단 한 가지 선악을 알게 하는 과일만은 먹지 말아라. 그것을 먹으면 네가 반드시 죽을 것이다.”
(창세기 2:15-17 )
[1]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하신 동물 중에서 뱀이 가장 교활하였다. 뱀이 여자에게 “하나님이 정말 너희에게 동산에 있는 모든 과일을 먹지 말라고 하셨느냐?” 하고 묻자 [2] 여자가 뱀에게 대답하였다. “우리가 동산의 과일을 먹을 수 있으나 [3] 동산 중앙에 있는 과일은 하나님이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아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죽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4] 그때 뱀이 여자에게 “너희는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다. [5] 하나님이 너희에게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너희가 그것을 먹으면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분별하게 될 것을 하나님이 아셨기 때문이다” 하고 말하였다. (창세기 3:1-5 KRV)
저희 교회에서는 주일마다 성도들이 돌아가며 말씀을 나눕니다.
이 글은 그 자리에서 제가 선악과 본문을 통해 나누었던 묵상을 정리한 글입니다.
어릴 때부터 신앙은 내 삶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내가 자라난 기독교 문화는 어딘가 유교와 닮아 있었다. 아버지 하나님 말씀에 절대순종해야 했고, 자녀는 부모를 기쁘게 해야 하는 존재였다. 끊이지 않는 예배와 경건해 보이는 형식들이 강조되었다. 나는 그 안에서 그럭저럭 신앙생활을 해 왔다.
그러다 인생에서 해결되지 않는 문제 앞에 섰다.
하나님을 제대로 믿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즈음, 내 안에 오래 묻혀 있던 질문 하나가 떠올랐다.
하나님은 왜 선악과를 만드셨을까.
솔직히 말하면 선악과 이야기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마치 고양이 앞에 생선을 가져다 놓고 먹지 말라고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연약한 인간 앞에 탐스럽고 먹음직한 선악과를 만들어 놓고 먹지 말라고 하셨다가, 먹었으니 죄인이라 하고, 죄인이니 벌 받아 마땅하다고 말하는 구조였다. 그리고 구원해 주셨으니 감사하라고 말한다.
그 흐름이 내게는 너무 가학적으로 느껴졌다.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 질문은 신앙을 부정하려는 질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을 너무 믿고 싶어서 나온 질문이었다. 그런데 그 질문을 꺼내자 돌아온 것은 답이 아니라 침묵과 불편함이었다. 그날 나는 알게 되었다. 아, 이건 해서는 안 되는 질문이구나.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배워 온 기독교 안에는 뿌리 깊은 순환 논리가 있었다.
선악과는 불순종을 상징하고, 불순종했기 때문에 버림받았으며, 죽어 마땅한 죄인이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이제 다시는 죄를 지으면 안 된다는 논리였다. 그런데 죄를 짓는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개인의 책임이었다. 그러니 정신 차리고 깨어서 조심하며 살아야 했다.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무조건 순종하라고 배웠다.
선악과를 단지 불순종의 문제로만 해석하는 이 관점은 유전자 속에 있던 인간의 죄책감을 건드려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떠나지 못하게 했다. 정확히 말하면 교회를 떠나지 못하게 만드는 논리였다. 이것은 복음처럼 말해졌지만 실제로는 인과응보적 세계관이었다. 복을 주시는 하나님께 버림받지 않으려면 조심해서 살아야 했고, 늘 잘 선택해야 했다. 잘못하면 그 책임은 인간의 몫이었다.다시 회개하고 더 노력해야 했다.
그래서 삶은 늘 긴장의 연속이었다.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보고 계신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 하나님을 떠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사랑할 수도 없었다.
그러던 중 새싹공동체 안에서 전혀 다른 경험을 하게 되었다. 이 곳에서는 질문이 금지되지 않았다. 자유롭게 질문했고, 자유롭게 토론했다. 하나님은 질문을 피하시는 분이 아니었다. 자녀의 이상한 질문과 엉뚱한 대답에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가르치시는 분이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끊임없이 선악과에 대해 질문했다. 그 과정에서 선악과를 바라보는 관점도 계속 변해 갔다.
지금 내가 깨닫고 있는 선악과의 비밀 역시 아주 부분적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 작은 깨달음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내가 상상해 본 에덴동산과, 내가 먹었던 선악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 한다.
이제부터, 내가 상상해 본 에덴동산 속으로 들어가 보려 한다.
에덴동산은 정말 아름다운 곳이었다.
아름다운 에덴동산을 창조하시고 지혜롭게 다스리시는 하나님은 아담에게 너무 멋지고 아름다운 존재였다.
아담은 에덴동산을 관리했고, 동물의 특징을 파악해 이름을 지을 만큼 지혜로웠다(창 2:15~19).
하나님의 보호 안에서 아담은 마음껏 자유를 누리며 살았다. 다만 한 가지, 하나님은 선악과만은 금하셨다.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말씀하셨다. 그 말에는 분명한 엄중함이 있었고, 지혜로웠던 아담 역시 그 무게를 느꼈을 것이다. 오랜 시간 동안 아담은 선악과를 건드리지 않았다.
어쩌면 사단의 유혹하기 전까지는 그렇게까지 먹고 싶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에덴에서 인간에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주셨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안전한 관계 안에서 자유의지가 성숙해 가도록 키워 가고 계셨다. 그러나 에덴에는 그 계획을 방해하려는 사단도 함께 존재했다. 그럼에도 인격적인 하나님은 인간을 함부로 통제하지 않으셨다.
그러던 어느 날, 뱀이 하와에게 다가왔다.
뱀으로 형상화된 사단은 흉측하지 않았다. 어떤 동물보다 아름답고 보드라웠으며, 화려한 언변을 지니고 있었다.
사단은 소통을 중요하게 여기고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인간에게 끊임없이 다가가 달콤한 말을 건네며 관계를 쌓아 갔다.
그렇게 관계가 깊어지던 어느 날, 뱀은 혼자 있던 하와에게 선악과 이야기를 꺼냈다.
하와는 선악과에 대한 이야기를 직접듣지 않고 아담에게서 전해 들은 상태였다.
“하나님이 선악과를 먹으면 진짜 죽는다고 했어? 확실해?”
하와는 잠시 머뭇거렸다.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했대. 죽는다고 했대.”
사실 하나님은 만지지도 말라고 하신 적은 없었다.
뱀은 곧바로 말을 이었다.
“선악과를 먹는다고 절대 안 죽어. 먹으면 하나님처럼 지혜로워질 거야. 하나님은 너희가 하나님처럼 지혜로워지는 게 싫으신 거야.”
사단은 하와 안에 있던 불확실성을 집요하게 흔들었다. 그리고 하나님처럼 아름다워지고 싶었던 하와의 내면의 욕구를 끌어냈다. 동시에 하나님을 오해하도록 만들었다.
하와를 너무나 사랑했고, 하나님처럼 지혜로워지고 싶었으며, 아직 죽음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아담도 결국 선악과를 먹었다. 인간은 충분히 똑똑했지만, 유혹을 분별해 낼 만큼 성숙하지는 않았다. 배운 것은 많아 지식은 풍부하고, 몸은 이미 어른이 되었지만, 달콤한 친구의 말에 마음이 흔들리는 사춘기 아이처럼 말이다.
사단의 말처럼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눈이 밝아졌다. 그러나 미숙한 상태에서 밝아진 눈은 곧 나와 남을 구분하고, 비교하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느끼지 못하던 ‘다름’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사자의 갈기는 위협적으로 느껴졌고, 동물들의 날카로운 발톱이 두려워졌다. 화려한 공작새 앞에서는 자신의 희미한 모습이 부끄러워졌다. 항상 자신을 비추던 하나님의 밝은 빛마저 두렵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미성숙한 상태에서 밝아진 눈은 인간에게 수치심과 불안감을 주었다. 그때부터 인간은 스스로를 가리기 시작했고, 숨기 시작했다.
선악과를 먹은 일에 대해서도 잘잘못을 따지기 시작하며 서로를 향한 비난과 정죄가 시작되었다.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드러나지 않던 서로의 바닥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랑의 에덴동산은 그렇게 조금씩 지옥으로 변해 갔다.
하나님이 계셔야 할 관계의 자리에 사단이 들어왔다. 서로에 대한 신뢰는 깨졌고,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인간은 판단력을 잃어 갔다.
그런 상태의 인간을 에덴에 그대로 둔다면, 에덴동산이 지옥으로 변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잠시 에덴에서 내보내기로 결정하셨다.
엄마의 자궁과 같았던 에덴동산을 떠나, 세상 속에서 인간을 키우기로 하셨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하나님 대신 스스로 재판관이 되어 선악을 판단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판단하며 살며 인간은 평화와 평안을 잃었다.
인간의 내면에서는 비교와 불안, 두려움과 자기 보호가 쉼 없이 충돌하고 있었다.
다름을 받아들이지 못한 인간은 힘을 사용해 타인을 자기 뜻에 종속시키기 시작했고, 세상은 점점 약육강식의 질서로 흘러갔다.
끝없이 서로를 분리시키고 소외시키며, 세상은 전쟁터로 변해 갔다.
한편 수많은 전쟁 속에서 상처 입은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하려 애쓰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지식을 구원이라 여겼고, 어떤 이들은 예술과 자유를 구원이라 여겼다. 또 어떤 이들은 종교와 철학을 만들어 스스로를 정결하게 하고, 아름답게 만들어 구원에 이르려했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는 분명히 말해 준다.
인류가 쌓아 올린 수많은 과학과 기술, 예술과 철학, 종교와 도덕률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마음은 점점 더 어두워져 갔다는 사실을.
그래서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를 ‘말세’라고 부른다.
그렇게 스스로 살고자 했던 인간은, 스스로 죽어 가고 있었다.
이제 다시 내 이야기를 해 보려 한다.
나의 역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린 시절에는 부모의 보호 아래에서 살며, 내가 잘나서 잘 사는 줄 알았다.
조금 자라서는 세상이라는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해 지식을 쌓았다. 그때는 하나님조차 내 힘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처럼 여겼다.
그러나 삶은 행복하지 않았다. 아는 것이 오히려 독이 되어 관계는 병들어 갔다. 그즈음 나는 다시 종교를 통해 ‘선’을 추구하려 했다.
하나님은 너무도 공정하고 멋있어 보였다.
나도 예수님처럼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싶었다.
모든 예배에 빠지지 않았고, 새벽부터 하루 종일 설교를 들었다. 큐티를 하며 끊임없이 반성하고 적용하려 했다. 어머니학교와 부부학교에서 많이 배우고 깨닫기도 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알면 알수록, 나는 죄책감 속에서 더 깊이 병들어 갔다.
순종하기 위해 억지로 눌러 두었던 결핍과 억울함은 결국 터져 나와 약한 사람들에게 향했고,마침내 나 자신에게로 돌아왔다.
혹시 성령이 충만하지 않아서일까 싶어 눈물로 기도했다. 방언도 했고, 치유집회와 기도원을 찾아다녔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 보았다.
그렇게,
악이 아니라 선을 먹었다.
정말 열심히 먹었다.
그런데 나는 분명히 죽었다.
나만 죽은 것이 아니었다.
가족도 함께 죽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선악과를 배불리 먹고 죽어 있던 나에게 예수님이 손을 내미셨다.
아니, 사실은 늘 곁에 계셨던 예수님의 손을 내가 그제야 보게 된 것이었다.
그제야 나는 생명나무이신 예수님을 먹었다.
아빠가 주시는 생명나무 열매를 먹은 나는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비로소 알게 되었다. -선악과가 아니라 생명나무를 먹어야 살 수 있다는
것을.
-왕의 자리, 구원자의 자리에서 내려와 자녀로 사는.
삶만이 죽지 않고 사는 길이라는 것을.
-인간은 서로 연결되지 않고서는, 혼자서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것도 .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지혜는 ‘옳고 그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은 생명나무를 한참 먹은 후에야 비로소
보였다.
이제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보려 한다. 하나님은 왜 선악과를 만드셨을까?
어쩌면 선악과는 공의를, 생명나무는 사랑을 드러내는 표징이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이었다.
공의는 죄를 드러내지만, 사랑은 죄를 덮는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선악과를 아예 감추어 두지 않으셨을까?
그것은 자유 속에서 자녀를 성숙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양육 방식이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자유는 배반의 가능성을 품고 있기에 매우 위험하다. 그러나 자유를 제한한 사랑은 더 이상 사랑이 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위험을 분명히 경고하시되, 억지로 막지는 않으셨다.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를 소중히 여기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선악과를 먹은 이후에도 하나님은 인간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인간의 자유를 박탈하지도 않으셨다.
대신 하나님은 생명나무를 화염검으로 지키시며, 때가 찰 때까지 기다리셨다.
섣부른 은혜가 자유의지가 자라날 기회를 빼앗을 수 있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만약 선악과를 먹은 즉시 모든 것을 덮어 주셨다면, 아담은 자라지 못한 아이로 에덴에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반대로 끝까지 선악과를 먹지 않았다면, 탕자의 비유 속 큰아들처럼 아버지 사랑의 너비와 깊이를 끝내 알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마침내,인간의 죄가 끝까지 드러나 하나님이신 예수님마저 죽임 당하는 지점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공의를 넘어서는 사랑으로 인간의 모든 죄를 덮으셨다. 아이러니하게도 죄가 깊었기에, 은혜는 더 찬란하게 빛났다.
때가 차서, 이미 오래전부터 내밀어져 있던 그 은혜 앞에 비로소 “예”라고 말하게 된 사람들이 바로 우리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접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성장의 시작이었다.
이전의 지식으로 배운 기독교는 이런 메시지를 주었던 것 같다.
은혜를 경험했으니 이제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생명을 이론으로만 알고, 아직 삶으로 살아 보지 않은 사람들이 하는 말이었다.
생명을 받았음에도 여전히 옳고 그름을 따지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며, 잘 자라지 않는 나 자신을 바라보며, 나는 오랜 시간 죄책감에 시달렸다.
왜 아직도 이 모양인지,
왜 여전히 흔들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다 서서히 ‘생명은 자라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제야 나는 나 자신을 조금씩 봐주기 시작했다.
생명을 받자, 죄에 대한 감각도 함께 살아났고 상처에 대한 통증도 다시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연약함과 허물마저 사랑으로 덮이는 데에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생명나무 안에서는 선악과의 지독함조차 점점 힘을 잃어 간다.
더딘 것처럼 보여도,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으며 자라는 사이 어느덧 우리 안에도 아빠를 닮은 작은 열매들이 맺히기 시작한다. 자신의 열매는 잘 보이지 않지만, 다른 사람의 열매를 통해 그것을 알게 된다.
-포기하지 않고 누군가를 받아 주는 화평의 열매,
-더 큰 사랑을 위해 내 자유를 내려놓는 절제의 열매,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생명을 나누는 섬김의 열매,
-때가 찰 때까지 누군가를 기다려 주는 인내의
열매들이다.
사단은 선악과가 눈을 밝게 해 줄 것이라 속였다. 그러나 오히려 생명을 계속 먹다 보니 눈은 점점 더 밝아졌다. 그 밝아진 눈은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다른 사람의 아름다움을 보게 해 주었다.
생명의 눈으로 본 ‘다름’은 더 이상 틀림이 아니었다. 다름은 은혜였고, 선물이었다.
나는 이 나눔을 위해 꽤 오랜 시간을 준비해 왔다.
그 긴 과정 속에서 한 가지를 분명히 깨달았다.
선악과의 이야기는 옳고 그름의 열쇠로는 열리지 않는 이야기라는 사실이다.
선악과 사건은 하나님의 사랑의 열쇠로만 풀리는 비밀스러운 이야기였다.
그것은 인과응보의 이야기가 아니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눈물겨운 사랑 이야기였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악 가운데서도 선을 이루어 내신다. 어둠 속에서 빛을 창조하시듯, 저주와 실수마저 축복으로 바꾸어 내시며, 끝까지 자녀의 손을 놓지 않으시는 분이다. 그 멋진 분이 바로 우리의 아빠이시다.
마지막으로, 예전에 썼던 시 한 편을 읽으며 이 이야기를 마무리하려 한다.
사랑했기에
나의 손으로 너를 빚었고,
사랑했기에
나의 전부를 너에게 불어넣었다.
사랑했기에
돌아선 너를 붙잡지 않았고,
사랑했기에
떠나간 너를 부르지 않았다.
오직 매일 밤
문가에 서서
너의 얼굴을 간절히 기다렸다.
텅 빈 길 끝,
작은 숨결 하나만 느껴져도
나는 맨발로 달려 나간다.
아직 어둠 속을 헤매는 너에게
묻지 않는다—
책망도,
기한도,
떠난 이유도.
다만 너의 길이
나에게 닿을 수 있도록
등불을 밝혀 두고
문을 열어 두었다.
사랑했기에
지금도
사랑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