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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율립 Mar 06. 2019

<가버나움> 삶과 죽음 사이의 공백




<가버나움>이 어머니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돌았다. 우리 어머니는 친구분에게서 "이 영화를 보면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는 추천을 받았다며 나를 영화관에 데려갔다. 같은 날 동료 역시 어머님에게서 같이 보러 가자 제안을 받았다고 한다. 


세상에! 칸 심사위원상을 받은 영화를 보러 가자는 제안을 어머니에게서 듣게 되다니!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새로운 마케팅 비기가 발견되었거나, 이 영화 보편적인 정서를 자극하는 수작이거나.







1. 파리의 앙트완


앙트완 in 아가일. 역시 패션국.


프랑스와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에서 앙트완은 바람을 피우는 어머니와 계부 그리고 권위주의적인 학교에 반발하며 집을 나간다. 저항으로서 가출이다. 파리의 압제는 소년에게 자유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앙트완은 집을 나가 바다로 향한다. 멋진 리토릭이다.


냉담한 부모를 가진 것은 400번 구타를 맞는 것처럼 욱신 거리는 고통이다. 차라리 그럴 바에야 집을 나가는 것이 소년의 자유를 실현하는 길이었다. 그러나 앙트완은 곧 잡히게 되고 청소년 교화원에 들어가 갇히게 된다. 그리고 그곳을 탈출하여 진짜 바다 앞에 서게 되며 자유를 외친다. 


바다는 우리가 갈 수 있는 한계이며, 더 멀리 가기 위한 시작이다. 앙트완은 자유를 찾아 극한으로 자신을 밀어내며 동시에 그 자유의 시작점에서 카메라를 응시하며 관객에게 용기를 준다. 


"너희들도 너희의 바다로 달려가!"






2. 베이루트의 자인



여기 베이루트의 소년 자인이 앙트완의 부름에 화답한다. 과거 베이루트는 중동의 파리라 불렸다. 마치 환등기로 파리의 필름을 투사한 듯, 화려하고 자유로운 도시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제3세계에 머물러 있다. 그곳에선 아이라도 많이 낳아야 한다. 이는 인류 보편적인 현상이다. 아이를 가질 때에는 그건 희망이고 힘든 삶의 보상이다. 그러나 낳고 난 이후에 아이는 절망을 확인시켜주는 현실의 징벌이 된다.


자인은 자고 나면 동생이 팔려가는 지옥 같은 현실에서 도망친다. 가출이라는 표현은 가당치 않다. 그저 도망이다. 길거리에 나가야만 먹을 것을 구하는 현실에서 저항으로서의 가출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지옥의 현실에서 자연스럽게 먹을 것을 찾아 유목을 떠난다.


그러나 집 밖, 도시 한 복판이 아이에게 우호적일 수 있겠는가. 자인은 사람을 찌른다. '400번의 구타'는 아무것도 아닌 이 도시에서 내성이 생긴 아이는, 바다에 가는 것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사람을 찌르는 것이 그의 생존 방식이다. 씁쓸하지만 지옥에 사는 아이가 칼을 드는 것은 지옥에서 버티는 나름의 방법이다.


영화는 가출도 사치가 되는 도시 그리고 바다가 아닌 평범한 집을 그리는 아이를 보여주며 출산과 양육에 대한 사회적 책임에 대해 질문한다.






3. 3세계 영화 관람의 딜레마



<가버나움>의 자인(자인 역을 맡은 배우 자인)은 실제 베이루트의 길거리를 떠도는 국가의 기록 망에 존재하지 않는 유령이었다. 에티오피아에서 온 아이 엄마 라힐은 촬영 이후에 불법 체류로 잡혀갔다. 영화는 리토릭이 아닌 리얼리티로 구성된다.


영화를 보면서 빈곤한 저 세계가 그들의 일상이고 현실인데, 나는 여기서 그걸 여가 시간에 소비한다는 사실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누군가의 비참한 현실을 보며 '부모님에 대한 감사함'이나 '공감능력 작동에 대한 안도감' 따위의 위로를 받는 것이 폭력적이며 비인간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이 영화를 본 관객이 유니세프에 당장 전화를 걸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 영화를 봄으로써 출연진들의 처지가 나아지고, 유능한 젊은 감독이 또 다른 고발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것이라 생각했다. 우선 이렇게 적당히 타협하였다. 





4. 삶과 죽음 사이의 공백


<400번의 구타>의 앙트완이 돼보는 상상을 해본다.


자신을 개똥 같은 세상에 태어나게 한 부모님을 고소한 자인에게 어떤 판결문을 들려주고 싶은가?


나는 원래 세상은 그 자체로 축복이며, 아무리 불행한 처지라도 죽음보다는 힘든 삶이 낫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3세계의 현실을 보는 딜레마를 느끼며, 이 세상에는 결이 다른 공간에 사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그렇게 생각이 바뀌었다. 세상에는 단순히 삶과 죽음만 실재하는 게 아니다.


삶과 죽음 사이엔 공백의 공간이 있다. 끝이 안 보이는 인간 이하의 비참한 생활로 채워진 공간이다. 인간은 거기에 들어가서는 안되며, 우리는 그걸 방치해서도 안된다. 이것이 인류애이며 공동체를 사는 사람으로서의 책임이다. 자인은 그 공백에서 살았다. 그런 자인을 보며 일종의 부채감을 느꼈기에, 영화 관람의 딜레마를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자인과 같은 아이는 수도 없이 많으며, 계속해서 생겨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도처에 있다.



이제 판결을 내리겠다.


주문, 자인과 같은 이웃을 공백의 공간에 방치하는 우리 모두 유죄다.







현실이 영화를 찢고 나온다.

<가버나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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