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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율립 Mar 09. 2019

<봄날은 간다> 멜로 영화의 플라톤



나에게 이 영화는 뤼미에르고 시민케인이고 대부이다.

재밌고 잘 만든 영화는 많이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내 마음속 특별한 한 자리에 놓고 싶은 딱 한 작품이다.


말하자면 어머니 같은 영화이다.




철학자 화이트헤드는 "모든 서양철학은 플라톤에 대한 주석이다."라고 했다.

서양철학의 대부분은 플라톤의 철학이 다뤘던 것들에 관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봄날은 간다>는 사랑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그려낸, 이를테면 '멜로 영화의 플라톤'이다.





우리는 이 영화에서 사랑이 무엇이고, 어떻게 시작하며, 왜 끝나는지 알 수 있다.


비단 사랑뿐은 아니다.






1. 사랑은 타이밍의 문제이다.



상우와 은수의 첫 만남


"한은수라고 해요. 근데 좀 늦으셨네요."


이혼한 경력이 있는 은수의 첫인사다. 은수는 사랑의 아픔이 있는 내게 너무 늦게 찾아왔다며 상우를 꾸짖는다. 그 둘이 한쪽은 너무 늦게, 다른 한쪽은 너무 빨리 만난 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우리 인생은 이렇게 대책 없이 펼쳐지기 마련이다.


사랑은 머랭이다. 까다로운 조건들이 맞아야 완성된다. 많은 조건들이 있지만 그중에서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타이밍이다. 사랑의 대부분의 적들은 타이밍이다.

두 사람의 타이밍이 다르면 연애에 힘이 든다. 바라는 게 다르고, 생각하는 게 다르고, 서로를 그리는 게 다르다. 그리고 보통 초심자의 사랑이 더 힘들다. 그래서 사랑에 어린 사람은 을이 된다.


은수는 '내가 이혼의 아픔까지 겪고 나서야 나에게 오셨네요. 그래도 한 번 잘해보세요.'라고 말하듯 상우에게 무표정한 악수를 청한다. 두 사람의 별 거 없는 첫 만남이지만, 실은 사랑의 잔인함을 보여 주는 장면이다.


사랑은 타이밍이 맞아야 한다.






2. 사랑은 쉽게 시작된다.



타이밍이 안 맞아도 사랑은 일단 시작된다.


사랑에 빠질 때 이성은 긴 잠에 빠진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이성은 평생 일하지 않던가? 그래서 종종 쉴 요량으로 우리를 사랑에 빠지게 만들고 어디론가 숨어 지낸다. 그래서 사랑은 이성의 여과 없이 시작된다.


영화는 비록 극단적으로 다른 처지에 있는데도, 누군가와 연애를 시작하는 것은 정말 쉽다는 것을 보여준다.



1.


할머니의 지혜를 연애에 사용하는 상우


"이렇게 움직이세요."


상우는 은수가 종이에 손가락을 베어 피가 나자 할머니에게서 배운 민간요법을 시킨다. 은수는 상우를 따라 하며 손을 들고 흔든다. 몸은 나의 고유 영역이다. 나만의 것이며, 나만이 통제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옆에 있는 낯선 이가 내 손을 들게 하고 흔들게 한다면(그것도 피 흘리는 나를 위해..) 그가 특별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2.


역시 방송국 PD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다.


"소화기 사용법 아세요?"


누군가에게 특별하게 인식되는 또 다른 방법. 비일상적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소화기 사용법'을 아냐면서 낭독하는 모습은 은수의 외모와 상관없이 매력적이다. 우리는 반복을 싫어한다. 잘 알고 있는 것에서는 배울 것도, 재미를 느낄 부분도 없다. 이러한 일상성을 깨는 대화를 건네는 사람은 흥미롭게 느껴진다.




3.


창밖의 비를 보다 전화기를 집어 든다.


그리고 운이 완성한다.


몇 번의 첨예한 대화를 주고받은 것만으로는 아직 부족하다. 따지고 보면 이런 인연은 종종 생기는 법이다. 아직 미완성인 인연을 완성시키는 것은 운이다. 무인도에 두 남녀가 갇히는 상황이 아닌 한 운의 도움이 필요하다. 은수가 집에서 일할 때, 비가 오지 않았다면 상우에게 전화를 걸었을까? 감정은 분위기에 취약하다.  폭력적으로 말하자면, 감정은 분위기를 타고 전달된다.







3. 이런 사람이 범인이다.


"상우 씨, 우리도 죽으면 같이 묻힐까?"


사랑할 때 공수표를 남발하는 사람이 이별의 범인이 된다. 적정 수준의 애정 표현에 대한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러나 말은 어디까지나 말일뿐이다. 수백 번 사랑한다고 말하여도 그 사랑을 증명하는 행동 한 번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사랑하는 것은 나의 귀가 아니라 나 자체이다.


"죽으면 같이 묻힐까?", "영원히 사랑해"라는 말은 자신의 부족한 애정이 불안하기 때문에 이를 달래기 위해 나오는 게 아닐까?


애정표현은 쥐어짜는 게 아니라 흘러넘쳐지는 것이다. 공수표를 남발하는 사람은 1. 쥐어짜 내는 사람이거나 2. 상대를 담을 그릇이 작은 사람이다.




어.. 어 가.


또한 범인은 세상에 당당하지 못한 사람이다. 세상에 사랑만큼 아름답고 자랑스러운 게 있을까?  다른 이에게 보여주지 못하는 사랑은 어딘가 문제가 있다. 진심이 결여되어 있거나, 애초부터 어려운 조건이었거나. 은수는 무엇이었을까? 둘 다일 것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상우를 만나고, 상이한 타이밍이라는 악조건 속에 연애를 하고 있었다.





4. 사랑은 같은 곳을 보는 것.


"라면 먹을래요?"라며 상우를 집에 들였던 은수. 둘은 주야장천 라면만 먹는다. 라면에 김치가 빠질 수 없다.

김치 얘기가 나온다. 그러다 집에 인사드리러 가자는 상우의 말에 은수는 표정이 굳어진다.


"상우 씨, 나 김치 못 담가"


만일 알파고와 같은 AI가 연애를 한다면 여기서 은수에게 이별을 고했을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상우는 '사랑치 소년'의 표상이다. 상우는 은수의 마음이 나와 같지 않은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들은 자는 상우의 청각이지 마음이 아니다. 이 연애 초심자는 당황하며 코앞에서 확인한 사실을 부정한다. 그것도 두 번씩.


"내가 담가줄게."

"내가 담가줄게..."


사랑은 두 사람이 같은 목적지를 그리고 있어야 완성된다.

그러나 상우와 은수는 다른 목적지를 갖고 있다. 한 명은 알면서 모른척했고, 한 명은 이제 알았다.


서로 마주 보는 것은 쉽지만,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은 어렵다.



라면 같은 사랑을 원한 여자, 김치 같은 사랑을 원한 남자






5. 노인을 위한 나라는 있다.


"버스 하고 여자는 떠나면 잡는 게 아니란다."


사랑하면 헤어진다. 통계를 가져오지 않아도 우리는 잘 안다. 더군다나 삶의 양식은 계속해서 복잡해지고 있고 우리의 욕구도 다양해지고 있다. 사랑밖에 난 몰라하는 시대는 지났다.

그러니 오늘날 우리는 사랑하면 헤어진다(마지막 한번 빼고).


상우의 할머니는 상우의 길을 이미 걸었던 인물이다. 사랑하는 이의 마음이 다른 사람에게 떠났지만, 그걸 받아들이지 못한 채 치매에 걸렸다. 할머니는 떠난 사람을 보내주지 못하고, 미련속에서 허우적대다 여생을 마감한다.


그런 당신에게 어린 손자는 생에 끝자락에 주어진 한 번의 기회이다. 상우가 자신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길 바라 한다.


할머니는 유언을 남기며 세상을 떠났다. 그 누구보다 절절하게 한 사람을 미련하게 그렸던 인물에게는 손자에게 해주는 사랑에 관한 조언이 '인생의 마지막 한 마디'였을 것이다. 사랑이 곧 그의 인생이었다.



봄이 다시 나를 시험하러 찾아왔다.



우리는 살면서 결정적 순간을 몇 번 마주한다. 진정으로 성장할 수 있는 순간 말이다.


"우리 같이 있을까?"


은수의 물음에 상우는 닫고 있던 입을 더 굳게 닫으며 미련을 막는다.


가슴 아픈 상우의 첫사랑이 끝났다.

그리고 상우는 성장했다.

'변하지 않는 것은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사실뿐'이라는 진리를 깨달았을 것이다.


어떤 영화는 인생의 불운함 앞에서 인간의 지혜는 무기력하다며 '노인 무용성'을 주장한다.

그러나 사랑에 관해서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있다.








영화를 따라가다 보니 내가 보았던 게 단순히 사랑이 아니라 인생에 관한 것이었다.

인생의 모든 것은 변한다. 우정도 변하고, 열정도 변하고, 기호도 변한다.





모든 것이 변하지만 나는 웃고 싶다. 당신도 웃을 수 있기를.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는 물음의 답을 찾아가는 성장 영화.

<봄날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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