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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율립 Mar 10. 2019

<그린북>저희 오스카 맡겨놓았어요







<그린북>이 9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작품상(Best Picture)을 수상했다. 그러나 국내 개봉일이 그렇게 늦지 않아서 오스카라는 최고의 스펙을 포스터에 달지 못했다. 



마치 토익 990점을 받고서도 성적 발표가 늦어져 자소서에 기입 못하는 상황 같아, 취준생으로서 조금 가슴 아팠다.










중국의 영화 포스터 디자이너 '황해'의 디자인이라 한다.



그래도 아카데미 최우수 작품상인데 그냥 넘어갈 수 없지! 토익 990점이면 인사팀에 전화 넣어도 된다.



시상식 후에 <그린북>을 봤다.

최우수 작품상을 받을 정도인가 의아스러운 첫 느낌이었다.


그런데 이래저래 퍼즐 조각을 맞춰봤더니 이 영화, 알고 보니 주최 측에 오스카상 맡겨 놓았던 것이다.




#OscarsColoredNow


소수 인종은 중앙으로 

"#OscarsSoWhite"


2016년 "오스카는 너무 하얗다" 해쉬태그가 SNS를 휩쓸며 아카데미가 백인 일색이라는 비판이 가해졌다. 지난 2년 간 남녀 주조연상 후보들 총 40명이 모두 백인들인 것에 대한 지적이다. 40명이 모두 백인인 것은 분명 합리적 의심이 가능하다. 오바마가 2009년에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 걸 고려하면, 아카데미가 꽤나 보수적인 곳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저조해지는 시청률을 고려해서였을까? 이번엔 달랐다. 남우주연상은 <보헤미안 랩소디>의 아랍게 라미 말렉(Rami Malek)이, 남우조연상은 <그린북>의 흑인 마허샬라 알리(Mahershala Ali), 여우조연상은 역시 흑인인 <이프 빌 스트리트 쿠드 토크>의 레지나 킹(Regina King)이 거머쥐었다.


그리고 최우수 작품상은 <그린북>이었다. 이 영화 한 줄로 요약하면, '흑인 가수와 백인 매니저가 팀을 이뤄 미국 남부를 여행하며 공연을 하는 여정'이다. 아카데미가 낮은 시청률과 잡음에 위기에 몰린 지금, 거 상 주기 딱 좋은 작품이다. 게다가 트럼프에 대한 비토 분위기가 있는 할리우드이기에, 품위 있는 흑인과 대비되는 과격한 백인을 묘사하는 부분에서 추가 점수 획득한다.





로드무비의 쿨타임이 끝났다.


They call it 북 ya



로드무비는 불후의 명작을 숫하게 배출했던 장르이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의 보니와 클라이드는 연인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고, <미드나잇 카우보이>는 뉴 아메리칸 시네마라는 사조를 드높였고, <델마와 루이스>는 페미니즘 영화의 대표작으로 남았다. 


그러면 최근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로드무비 장르가 최우수 작품상을 거머쥔 것은 언제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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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은 1988년. <레인 맨>이 마지막으로 오스카를 탄 로드무비였다.


서울 올림픽 기억하는 사람~~? 30년은 긴 시간이다.

공로상을 줘 마땅한 장르가 긴 쿨타임을 채웠으니, 로드무비라는 고전적 장르를 잘 구현한 이 작품을 상으로 치하할 만하다. 게다가 우리 기억에 남을만한 흑인과 백인 둘의 여정을 다룬 수작이 있었던가? 떠오르지 않는다.





할리우드는 안정적인 영화도 원한다.


이 영화로 인해, 이제 떼거지 정서는 고갈되었다. 내기 가능.



<그린북>은 충분히 예상 가능하다. 실화 기반의 영화가 대개 그러하듯 갈등의 파동이 심하지 않다. 그럼에도 희한하게 지루하지 않고 편안할 뿐이다. 오랜만에 안정적인 영화를 만나 반가웠다. 영화는 본래 체험이라 현실엔 없는 다이내믹한 체험을 제공해야 한다. 어벤저스 시리즈에 전 세계가 열광한 것이 그 방증이다. 1895년, 극장 상영작의 기원인 뤼미에르 형제의 <기차의 도착>를 보던 앞줄의 관객은 깜짝 놀라 허겁지겁 도망쳤다지 않은가. 그리고 100년이 더 흘렀다. 더 이상 영화를 삶이 지루해서 보는 것이 아닌 현실에서, 영화 관람의 목적은 휴식이 될 수 있다. 잘 연출한 안정감은 훌륭한 관람 포인트가 된다.


<그린북>의 안정감의 요인은 여러 가지이다.


첫째, 떠버리 토니는 절대 일을 그르치지 않을 사람이다. 토니는 과격하다. 교양과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그는 1. 그의 현명한 아내가 택한 사람이다. 아내의 선한 눈망울과 남편의 성정은 얽혀있다. 2.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있다. 아이와 배우자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악해지는 것은 영화의 헌법에 어긋난다. 3. 허풍과 거짓말을 구분한다. 거짓말은 삶에 짐을 더할 뿐이지만 허풍은 삶에 맛을 더한다. 4. 흑인 근로자가 사용한 컵을 버릴 때 주저했다. 시나리오의 작법의 정석은 캐릭터의 성격을 우선 보여주는 것인데, 이 씬은 토니의 선함을 보여준다. (시나리오 작법에 관한 책『Save the Cat!』에 자세히 나온다.)


둘째, 아웃포커싱과 비비드한 색감이 성인 동화를 보는 느낌을 준다. 아웃포커싱을 통해 배경이 흐리게 처리되어 관객은 불필요하게 인물 주변을 살피지 않는다. 영화를 믿고 보여주는 것만 보면 되니 얼마나 안락한가. 또한 영화는 자동차와 건물 그리고 의상의 비비드한 색감으로 보는 즐거움을 제공한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며, 플롯을 읽기도 했지만 그저 장면을 감상하기도 했다. 


셋째, 미국인에게 익숙한 클리쉐가 이끈다. 바로 필요할 때는 폭력을 사용하고, 그 상황이 정당하면 용서되는 전개이다. 토니를 연기한 비고 모텐슨(아라곤!)은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의 <폭력의 역사>에서 냉혈한 순수 폭력을 연기한다. 이 영화는 역사는 폭력이 전적으로 승리하고 살아남아 써가는 것이라며, 미국의 기원과 인간 세상에 대한 알레고리를 제시한다. 그러나 <그린북>의 강한 토니는 '절대 강'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그저 악당들에게 자위적 폭력을 가할 뿐이다. 광활한 땅에서 스스로 자신과 가족을 지켜야 하는 나라, 그래서 총기의 자유가 있는 나라 미국의 오래된 클리쉐이다. 



결론적으로 이 영화, 시의적으로, 장르적으로, 연출적으로 상 받을만했다.




끄덕.






여전히 전 세계에 필요한 오래된 다문화 지침서(그린북).

<그린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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