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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디에 Jun 07. 2022

월요일은 토요일에 시작된다 / 스트루가츠키 형제

젊은 과학자들을 위한 동화



"여기 솔로베츠가 이상하지 않으세요?"

"저는 이미 여기서 오래 살고 있어요. 이젠 익숙합니다."



신화와 민담 설화를 모티브로 하고 있는 소설은 작가의 유머와 역설과 풍자가 부제(젊은 과학자들을 위한 동화)에서 알 수 있듯 동화처럼 유쾌하고 발랄하게 그려진다. 세 가지의 난리법석에 관한 이야기는 화자 사샤가 들여다보는 세상을 비유적으로 말하고 있다.








알렉산드르(사샤)는 솔로베츠로 가는 숲길에서 히치하이킹을 하는 두 남자 코르네예프와 로만을 태워준다. 가벼운 대화 중 사샤가 프로그래머라는 말에 마침 자기들도 '인간이 된 프로그래머'를 구하는 중이라고 하면서 스카우트를 제의하고 알렉산드르는 이를 정중히 거절한다. 목적지에 도착한 두 남자는 잠자리를 제공하겠다며 '닭다리오두막'에 데려가고, 다음날, 알렉산드로는 잠자리에서 채 일어나기 전부터 기묘한 경험을 시작하는데 상상 속에서나 가능할 것 같은 상황은 계속 이어진다.


결국 로만의 제안대로 '요술과 마술 과학연구소'로 이직한 사샤는 처음으로 당직 근무를 한다. 상사의 지시대로 복제 인간이 근무를 하게 해서도 안 되고, 죽은 영혼이 드나들게 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1층을 시작으로 지하층부터 여러 층을 돌아다니며 예상치 못했던 문제들과 직면하고, 애초에 지시받은 지침은 무용지물이 된다.


회의 중 본의 아니게 자원하여 타임머신을 타고 유토피아 소설에서 묘사된 미래로 여행을 간 사샤. 그곳에서 복제 인간라고 여겼던 야누스의 비밀을 알게 되고, 젊은 과학자들은 인간의 운명에 대해 고찰한다.







첫번째 이야기에서 사샤와 꼬치고기와의 대화는 근현대 러시아 역사를 언급하며 과도한 노동과 열악한 노동환경, 동물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과학실험, 전쟁의 폐해와 잔인함 등을 얘기한다. 작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유물론자이고 이성주의자라고 말하면서, 모든 것이 그 즉시 이성적으로 설명되어 이미 잘 알려진 사실들의 덩어리에 편입되기를 원하고 있음을 꼬집는다. 이미 알려진 사실과 새로운 현상 사이에 우리가 정의할 수 없는 미지의 대양이 놓여일 수 있다는 가정을 부정하면서 초자연적이고 불가능한 것으로 덮어버린다는 것이다. 이는 곧 보여지는 것 외에 형이상학적인 것의 가치를 무시하는 현대 사회의 세태와 더불어 무력을 앞세운 강압을 비판하는 것일테다.


또한 인간의 죄가 '짓는' 것이 아닌 '만들어'지는 행태와 인간은 태어난다기보다 일정 모델의 규격에 맞춰 부화시킨다는 표현을 통해 국가 기관에서 지정한 것에 오류는 있을 수 없음을 전제로 명령의 무조건적인 실행이 인간이 존재 목적이라는 의식을 비판한다. 이 부분에서 작가들은 지구 온난화에 의한 기후 현상에 대해서 언급하는데, 교토의정서가 1997년에 협약했다는 사실과 이 책이 1964년에 출간된 점을 떠올려 보면 기후 변화에 관련한 우리의 각성은 이미 충분히 늦었음을 알 수 있다.



사샤가 일하는 '요술과 마술 과학연구소'에는 상부에서 금지하지만 마치 오래된 관례처럼 복제 인간이 일한다. 일반적으로 복제는 자기 원조에 충실한 복사본이다. 만일 일손이 부족한 사람이 있다면, 창의력이나 책임과는 무관하게 그 일만 완벽하게 해내는 자기 복제를 만들어 일을 대신하게 하거나 심부름꾼으로 쓴다. 소설에서 누구나 복제를 창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부서 주임들만이 복잡하고 정교하고 자율 학습 능력을 가진 복제를 창조해낼 수 있다. 이 대목은 위에서 언급한 '부화'와 연결되는 선상에 있다. 작가들은 소비에트 현실을 비판하기 위해서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겠지만, 막상 생각해 보면 현대인 역시 개개인이 갖고 있는 개성보다는 이상적 혹은 정상적 삶이라는 규격화된 틀에 맞춰 살기 위해 스스로를 복제 인간으로 전락시키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A-야누스와 U-야누스 중 누가 원본이고 복제인지 구분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대부분 비슷한 목표를 가지고 천편일률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연구서 건물은 바깥에서 보면 2층, 실제로는 12층 이상이다. 그러나 사샤는 한번도 12층 이상 올라가 본 적이 없다. 엘리베이터가 항상 수리 중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인민은 소비에트가 선전하는 이상과 낙원을 본 적이 없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일테고, 어쩔 수 없이 독자는 신자유주의의 현대사회에서 상위 몇 퍼센트 사람들이 거주하는 고층빌딩이 자연스럽게 연상될 수 밖에 없다.



연구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인간의 행복과 삶의 의미에 대한 문제를 탐구하지만, 정작 행복과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자신에 대해 적게 생각하고 다른 사람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해야 한다는 것과 오락보다는 일하는 것이 더 즐거워야한다는 것이다. 자율적으로 시간을 활용할 수 있는 일요일은 지루하고 무쓸모 시간으로 치부되며, 인간에게 있어 노동의 부재는 퇴화를 의미한다. 잠시, 많은 사람들이 여가를 즐겨야하고, 여행을 해야 하고, 자기 계발을 해야한다는 강박이 있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개인적인 성향도 있겠지만, 어느 누군가 혹은 집단이 만들어 놓은 좋은 삶, 혹은 성공이라는 모델(각종 광고와 SNS의 피드를 보시라)에 현혹되고 있는 건 아닌지 살펴볼 일이다.







이 소설의 유머는 1부에 있고, 역설과 모순이 2부에 있다면, 3부는 비유의 꽃이다. 사샤가 도착한 미래에서 여기저기서 흘러나오는 연설과 눈물을 흘리며 박수갈채를 보내는 군중의 모습은 마치 독재자의 전체주의적 선동과 그에 세뇌당한 이들을 연상시키고, 남자들을 우주로 발사하는 장면과 '철의 장막'은 군사동원과 소비에트 연방의 폐쇄성을 빗대고 있다. 그리고 소년이 말하는 '강제적 공손 시대'는 무조건적인 복종을 의미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철의 장막'이 두 세계를 나누고 있다. '인류애적 상상의 세계', '미래에 대한 공포의 세계'라는 것과 외계인들이 이성을 가진 바이러스를 인간의 몸에 심어 그들이 원하는 대로 복종하게 만든다는 부분, 그리고 기생충, 이성적 광물, 공산주의에 의해 인간이 노예가 된다는 등의 이야기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샤가 발견한 야누스의 비밀(이건 스포라 나도 비밀)을 통해 작가들은 자유의지를 가진 독립적인 삶을 살 수 없는 환경에 놓인 인간이 갖는 굴욕과 절망감을 말하면서 동시에 현재의 행동이 미래를 결정함을 말하고자 한 건 아닐까. 이 소설에서 묘사된 미래의 모습은 전형적인 디스토피아 사회다(이조차도 얼마나 재미있게 그려냈는지). 형제 작가는 이 세상이 복제와 환영의 세상이 될 것을 우려한 것으로 전해진다. 어쩌면 이 퍽퍽한 세상에서 필요한 건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약간의 요술과 마술일지도 모르겠다.



"사고하는 것은 여흥이 아니라 의무다"

(스트루가츠키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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