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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디에 Aug 26. 2022

나는 고백한다

자우메 카브레




"기억을 모두 잃어버리게 되면 고통으로부터는 자유로워지나요?"



첫 페이지부터 임팩트 있는 소설은 60대 알츠하이머 환자 아드리아 아르볼데의 회상으로부터 시작한다. 1690년 자키암에서 시작된 스토리오니 바이올린의 탄생 과정과 펠릭스 아르데볼, 그리고 그의 아들 아드리아로 이어지는 인생 여정이 바이올린과 맞물리는 두 개의 축으로 수백 년의 세월을 서술한다. 화자는 아드리아였다가 베르나트가 되기도 하면서 1인칭과 3인칭을 오가며 때로는 역사를 관조하는 역할을 자처하고 동시에 스스로를 타자화한다. 뿐만 아니라 이야기는 아드리아, 자키암, 펠릭스 아르데볼 등 주체자의 관점과 스페인, 독일, 벨기에, 슬로베니아 등 공간, 그리고 14세기부터 20세기까지 마치 파도가 들고나며 시간을 이동시키는 것처럼 시대를 경계없이 자연스럽게 넘나든다. 무엇보다 이러한 시공간 이동이 무작위적이지 않고 상당한 개연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놀랍다.








14세기 종교 재판과 20세기 아우슈비츠는 아주 유사한 양상을 띠고 있는데, 작가는 두 사건을 하나의 스토리로 엮어서 그려내고 있다. 또한 소유의 욕망을 대물림 받았다고 말하는 아드리아와 수많은 등장 인물을 통해 저지할 수 없는 인간의 탐욕과 생존이 죽음보다 더 가혹한 삶, 그리고 죽음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삶을 얘기하며 무한궤도처럼 끝나지 않고 순환하는 악의 본질과 효율성, 그에따른 자책과 죄책감이 뒤섞인 우리의 현재에 대해 통찰한다. 


작가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이처럼 악이 만연한 인류에게 있어서 문학과 예술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짚는다. 우리가 비극적 역사(그것이 공적이든 사적이든)에 대한 슬픔을 멈추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죽은 사람들과 그들의 기억을 애도하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역사에서 간과되고 있는 것은 박해와 대학살에서 살아 남은 자들의 경험과 진실이다. 소설 속 아드리아는 이 역할을 문학과 예술이 전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동시에 그에 대해 예술이 갖는 한계 또한 분명히 한다. 


결국 작가가 말하고자하는, 악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사랑이 아니었을까. 자신들의 땅에서 노예 생활을 하는 것도 모자라 카탈루냐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이주를 경험해야 했던 카탈루냐인들과 유대인은 비슷한 선상에 있음을 떠올려볼 때 작가가 카탈루냐인인 아드리아와 유대인 사라의 사랑에 부여한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소설은 지속적으로 악에 대한 본질과 회개에 대해 얘기하고 있지만, 나는 오히려 '삶'이 무엇인지를 더 고민해야 했다. 삶을 지속시키는 힘은 무엇이며, 우리는 왜 그토록 살고자 할까? 악의 본질에 대해 쓰고 싶었으나 결론은 아름다움의 이유에 대해 고찰하게 되는 아드리아의 모습에서 나는 무슨 생각을 했던가.






소설을 완독한 후 독자는 수많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된다. 신념 혹은 명분에 의한 범죄(악)는 정당한가? 왜 신은 애초에 악을 예방하지 않는가(또는 왜 악을 존재하게 했는가)? 욕망과 탐욕 앞에 무력한 인간 세상에서 죄를 저지른 자, 방관한 자, 침묵한 자, 그리고 회개하지 않은 자, 그들 중 누구의 잘못이 가장 무거운가? 


18세기에 만들어진 비알이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는 동안 인간의 죄악은 쉼없이 반복되었다. 이렇듯 현재 우리 보통의 일상 역시 악과 무관할까? 늘 마시는 커피 한 잔에서부터 수시로 사용하는 생활 가전, 귀금속 등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아동 노동 착취를 비롯해 헤아릴 수 없는 악을 저지르고 있으며,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를 모른 척 외면하고, 여러 방식으로 알게 모르게 동조하고 있다. 이 소설에서 악으로 대표하는 인물들의 공공연한 악 이외에도 경중의 차이가 있을 뿐 아드리아, 베르나트, 심지어 사라조차 '악의 범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주인공 아드리아 아르데볼은 끊임없이 악에 대한 고찰에 집착한다. 아버지가 자행한 악의적인 행위, 더 거슬러 올라가면 복수가 복수를 낳는 연쇄적인 폭력과 살인, 신념과 정의 실현과 자유를 명분으로 실행되는 폭력의 정당성, 무엇보다 이러한 폭력 앞에 무기력하다는 이유로 방관하는 자신에 대해 자책하며 고뇌한다. 그런데 나는 읽으면 읽을수록 소설은(혹은 아드리아)는 그럼에도 죽음이 아닌 삶(의 아름다움)의 이유를 찾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기억의 소멸 속으로 걸어들어가면서 그들 영혼과 존재의 흔적을 남기기 위한 아드리아의 처절한 글쓰기에 결국 나는 펑펑 울고 말았다. 이럼에도 우리는 이 소설에서 '악'에만 집중해야 할까. 


이 소설은 사폰의 <바람의 그림자>, 에이모 토울스의 <모스크바의 신사>와 함께 나의 '아름다운 소설' 중 하나가 됐다. 




인류의 문화사에 대해 고찰하고, 연주되기를 거부하는 악기를 잘 연주해 보려 노력하며 인생을 살아온 뒤 내린 결론은 우리, 우리 모두는, 우리 전부는, 우리 모두의 감정은, 여어엇 같은 우연일 뿐이라는 거야. 행동과 사건을 엮는 사실들, 우리가 만나는 사람, 우연히 마주치는 사람, 서로 지나치는 사람, 무시하는 사람이 모두 우연의 결과일 뿐이다. 우연은 모든 것을 지배해. 아니면 그 무엇도 우연이 아니라 이미 계획된 것일 수도 있지. 어떤 선언에 손을 들어 줘야 할지 모르겠어. 왜냐하면 둘 다 사실이니까. 그리고 내가 신을 믿지 않는다면 이미 그려 놓은 계획 혹은 운명 혹은 뭐가 됐든 그것을 믿는다고도 할 수 없어. 
(p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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