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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디에 Nov 07. 2022

최초의 인간

알베르 카뮈


35.

그를 까마득히 잊어버린 어머니밖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았던 사람이 없었다. 그는 그 점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잠시 이름 없이 왔던 이 땅 위에서 이름 없이 죽었다.



1913년, 알제 외곽 솔페리노의 생타포트르 농장 관리인을 맡기로 한 앙리 코르므리는 가족을 데리고 아랍인의 안내를 받아 농장을 찾아가는 중이다. 출산을 앞두고 있는 아내 뤼시는 도착하자마자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사내아이를 출산했다. 아이의 이름은 자크다.






이 소설은 카뮈의 미발표작으로써 교통사고로 사망할 때까지 소지하고 있었다는데, 시작부터 자전적 요소가 상당히 많이 보인다. <이방인>이 어머니의 부음으로 시작한다면, <최초의 인간>은 프롤로그 격인 자크의 출생을 지나 아버지의 무덤에서 시작한다. 



자크는 아버지의 무덤 앞에서 그가 스물여덟 살에 죽었다는 사실을 각성한다. 마흔 살인 지금의 자신보다 한참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았다는 사실을 확인한 순간 아버지를 향한 아들의 애도가 아닌 억울할만치 젊은 나이에 전쟁터로 끌려가 죽은 한 청년에 대한 연민의 감정이 북받친다. 카뮈는 이 부분에서 '전환점'이라는 꼬리를 달아놓았는데, 이는 자크가 아버지의 짧았던 삶과 자신의 청년 시절을 돌이켜보면서 그동안 죽은 아버지를, 한때는 살아있는 존재였다는 인정조차 하지 않고 외면했음을 떠올리며 '존재'와 자신의 '정체성'의 의미를 새롭게 생각하기 시작한 것일 터다. 자크는 이제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아보려고 한다. 


스승 말랑은 아버지에 대해 알아보겠다는 자크에게 제한된 의미의 정보 밖에 알 수 없을 거라면서 죽은지 40년이 된 한 인간에 대해서 피상적인 조사가 유의미하겠냐고 묻는다. 그런데 생사 여부를 떠나서 한 인간의 내면을 안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그리고 타인에 대해 속속들이 알겠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고, 설령 가능하다하더라도 때로는 모르는 게 더 나은 경우도 있다. 청년 자크에게 관심을 주고 세상에 대한 문을 열어준, 마치 아버지 같은 역할을 한 말랑 또한 내면에는 끔찍한 공허와 무관심이 내재한다. 이 장章의 첨삭을 보면 자크, 즉 카뮈는 삶의 지지대가 되어줄 아버지의 존재가 절실히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자크의 유년 시절을 살펴보면 장애를 안고 사는 엄마와 삼촌, 실질적으로 가정을 이끌어나가는 할머니 슬하에서 성장했다. 과부가 되어 가난과 고된 노동 속에서 살아온 할머니, 청각장애가 있고 제도권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으나 풍부한 상상력과 건장한 체격에서 뿜어져 나오는 삶의 활력이 있는 삼촌 에티엔, 문맹과 장애를 껴안고 자크의 엄마라는 것 외에는 그 어떤 욕구도 용납되지 않았던 가난, 장애, 미망인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마흔 살 무렵에 이미 노인이 되어버렸던 어머니 뤼시. 이들은 가난과 체념을 대물림하며 살아갔다.







자크가 태어나기 전, 당시 파리에는 실업자가 매우 많아서 제헌 의회는 해외 이주단을 보내기 위해 이주자 각자에게 집과 약간의 땅을 준다는 내용으로 상당한 규모의 예산을 가결했고, 많은 사람들이 약속의 땅을 믿고 지원했다. 그래서 알제 외곽에 많은 프랑스들이 이민자로 넘어왔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소위 '카레이스키'로 불리는 조선인의 중앙아시아 강제 대이주 과정이 생각났다. 협의와 대책 없이 보내진 이민자도, 강대국에게 속수무책 침략당한 원주민도 처절하고 비참하다. 


전쟁은 신체, 감정, 가족 등 많은 부분에서 훼손과 결핍을 일으킨다. 어른들은 자신의 가난에 죄의식을 느끼고, 주변은 너나 할 것 없이 똑같은 지경에 있으니 아이들은 슬픔이 슬픔인지도 모른 채 어린 나이에 용기를 강요당하며 애어른이 된다.


상급학교 진학 후 자크는 가난한 살림 때문에 방학 동안 사무실에서 근무하게 되는데 편하다는 생각보다는 아무런 육체적 노동 행위 없이 팔고 사는 행위의 천박함을 발견한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새로운 삶을 개척하기 위해 낯선 땅으로 이주한 앙리 코르므리를 떠올렸다. 어쩌면 카뮈 역시 마찬가지 아니였을까. 이는 넓게는 식민국과 피식민국을, 좁게는 자국민을 이주민로 만들어버린 정부와 가난때문에 이주노동자로 핍박한 삶을 살아냈던 하층민들의 구도가 아닐까싶었다.






자크는 아버지를 알기 위해 어머니부터 시작해 삼촌, 베르나르 선생, 탐잘 노인 등 그를 알 법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아버지 앙리 코르므리의 족적을 좇는다. 그런데 정작 그들을 통해 자크가 마주한 대상은 아버지가 아닌, 그동안 무심히 외면해 왔던 자신의 유년 시절이다. 


자크가 이 여정을 끝낸 뒤, 소회는 무엇이었을까. 자크에게는 아버지가 부재했지만, 그 자리를 대신해 주는 이들이 있었다. 침묵과 미소로 위로해주던 어머니와 거칠고 투박하지만 애정으로 자신을 지지해 주었던 할머니를 비롯해 에티엔 삼촌, 베르나르 선생이 성장의 시기마다 곁을 지켜주었다. 아버지를 통해 나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었기에 시작된 여정이었으나 자크는 오히려 하나의 '존재'로서 살아가는 인간들 각자가 갖는 분투를 깨닫게 된 건 아니었을까. 아쉽게도 독자는 자크의 생각을 확인할 수 없다. 



이름 없이 왔다가 잠시의 삶을 지나 이름 없이 사라진 이들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 새롭게 터전을 개척해야 했던 이들이 최초의 인간이 되어주었듯, 인간 개개인은 각각의 다른 의미로 존재하는 하나의 세계이자 그 자체의 정체성을 가지며, 그야말로 모든 인간은 온전한 자신의 생을 살아가야 하는 최초의 인간이자 최후의 인간임을, 카뮈는 말하고자 했던 것 같다. 


나는 이 소설이 한 개인의 회고록이자 기나긴 전쟁의 폐해에 대한 고발처럼 느껴진다.




203-204.

이 고장에서 태어나 뿌리도 신앙도 없이 살아가는 법을 하나씩하나씩 배우려고 노력하는 모든 사람들이, 결정적인 익명성으로 변한 나머지 자신들이 이 땅 위에 왔다가 간 단 하나의 거룩한 흔적인, 지금 공동묘지 안에서 어둠에 덮여 가는 저 명문을 읽을 수도 없는 묘석들마저 없어져 버릴 위험이 있는 오늘, 모두 다 함께 다른 사람들의 존재에 눈뜨며 새로이 태어나는 법을, 자신들보다 먼저 이 땅 위를 거쳐 갔고 이제는 종족과 운명의 동지임을 인정해야 마땅할, 지금은 제거되고 없는 정복자들의 저 엄청난 무리들에 눈뜨며 새로이 태어나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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