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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디에 Nov 08. 2022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아고타 크리스토프


"잊어버리게. 인생은 그런 거야. 모든 게 시간이 지나면 지워지게 마련이지. 기억은 희미해지고, 고통은 줄어들고. (...) 하지만 사라지지는 않네."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어제> <문맹>을 읽은 독자라면 이 책을 펼치기 전 마음의 준비를 하게 될 것이다. 하물며 재독인 나로서는 다시 읽기를 망설였으나 막상 이십 년 가까이 지나 다시 읽으려니 망설임보다는 애틋함이 더하다. 앞서 언급한 두 작품을 읽기 전에 이 책을 읽었을 때와 이후 읽는 이 소설을 읽는 감상은 사뭇 다르다. 무심코 지나쳤던 문장들이 하나하나 콕콕 박혀 들어온다.







아버지가 종군기자로 참전하자 어머니는 쌍둥이 루카스Lucas와 클라우스Claus를 시골에 있는 외할머니에게 맡긴다. 쌍둥이의 시골 생활은 숲을 뛰어다니며 자유를 만끽하는 천진난만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열악한 환경에서 그 나이 이상의 노동을 해야하며, 스스로를 보살펴야 했다. 


쌍둥이는 고통, 모욕, 수치심, 배고픔 등 모든 참기 어려운 것을 이겨내고 싶어 잔혹 연습을 한다. 그런데 폭행, 언어폭력, 굶주림, 학대가 연습한다고 익숙해질 수 있는 것들인가? 우리는 살면서 숱하게 정서적 폭력과 모욕을 당하지만 결코 익숙해질 수 없다. 


학교를 가지 못해 독학을 하는 쌍둥이의 글짓기를 보면 마치 감정이 없는 기계같다. '아름답다', '좋아한다', '친절하다' 처럼 주관적이기에 모호하다고 판단되는 단어는 모두 배제되고 있는 사실만을 나열한다. 언청이를 비롯해 타인에게 도움을 줄 때에도 상대의 상황과 감정에 이입하고 공감해서라기보다는 대상이 원하는 바를 실현해 주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니 누군가를 사랑하지도 증오하지도 않는다. 그들과는 반대로 애정을 갈구하는 인물이 언청이다. 관심만 받을 수 있다면 강간도 받아들이는 아이를 보면서 가슴 한 켠이 저릿해 온다. 


전쟁 중에 가장 약자는 여자와 아이들이다. 외국 군대든 해방군이든 약자들에게는 그들이 누구인지 의미가 없다. 가진 것이 없고 노동할 힘도 없는 소도시 여성들은 매춘을 하고, 보호자가 부재한 아이들은 성폭력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다. 어쩌면 쌍둥이가 감정을 걷어낸 것은 이러한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폭행, 협박, 살인 등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형제에게 도덕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생존이 도덕이다.






서로를 완전히 분리시키기 위해 헤어진 루카스와 클라우스. 클라우스는 월경했고 루카스는 혼자 남았다. 혼자 남은 루카스는 시간이 흐르는 것도 잊은 채 살아가고 있다. 그는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길을 잃었다. 루카스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밭을 갈고, 술집들을 전전하며 하모니카를 연주하고, 술에 취해 우연히 알게된 여자의 집을 찾아가는 게 전부다. 할 수 있는 게 없다. 국경지대 소도시는 떠나기만 할뿐 들어오는 사람이 없는 죽은 도시가 되어간다. 


공산주의 체제에서의 모든 책은 체제를 찬양하는 책 뿐이고, 이외의 책들은 모두 금서로 지정되었다. 정부는 사유 재산을 국유화하기 위해 암살을 서슴치 않고, 눈에 거슬리는 자들은 반체제 인사로 몰아 그 자리에서 사형에 처한다. 전쟁터에서든 강제수용소에서든 가까스로 살아남은 자들은 극심한 외상 후 장애를 앓으며 정신 병원에 수용되기 일쑤다. 매춘이나 강간으로 태어나 고아 아닌 고아가 된 아이들은 집단 탁아소에 맡겨진다. 


집회 금지, 주류 판매 금지, 식당 폐쇄, 여행 금지, 외출 및 야간 통행 금지. 공장은 다시 가동되고, 일터로 돌아가지 않은 노동자들은 해고 대상이며, 파업을 선동하는 자는 사형이다. 혁명이 성공했다는데, 저항운동과 투쟁과 동맹파업은 계속된다. 체포, 투옥, 실종, 처형도 계속된다. 침묵이 그들을 지배한다. 그 침묵 속에서 인민이 할 수 있는 일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 복종하든가, 죽음을 불사하고 떠나든가. 



인상적인 장면은 먼저, 페테르가 루카스에게 클라라를 사랑하냐고 묻자 사랑이라는 단어의 뜻을 모르겠다고 대답한다. 그러자 루카스는 당 서기관인 페테르에게 연설하면서 하는 말들을 진심으로 다 믿냐고 묻자 자신은 믿어야 하며 자신의 생각이 어떤지는 중요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치라고 대답한다. 사랑을 모르는 남자와 생각이 중요하지 않은 남자. 그러나 안다고 해도 무엇이 달라지랴. 이 부분은 3부에서 클라우스의 단상과 이어지는데 성性이 아닌 사랑과 존재를 금지당한 세상에서의 절망이 아프게 다가온다. 


루카스와 클라우스는 자신들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폭력과 살인을 불사했다. 마티아스가 학교에서 폭행을 당하고 돌아오자 루카스는 스스로를 지키라며 간석과 면도칼을 내놓지만 마티아스는 자신의 몸에 난 상처보다 자신이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하는 것이 더 참을 수 없는 상처가 될 거라고 말한다. 그러나 가장 사랑하는 존재인 루카스가 다른 소년에게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자 곧바로 상해를 가한다. 또한 마티아스를 소유하기 위해 루카스가 저지른 행위 역시 마찬가지다. 폭력과 애정을 동류로써 같은 선상에 놓고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라고 할 밖에. 


2부에서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장면이 아닐까싶은데, 글을 쓰고 싶어서 서점을 팔고 누나에게 간 빅토르가 남긴 글은 당시 시대를 여과없이 은유한다. 누나는 글을 쓰겠다고 찾아간 동생을 끊임없이 감시하고 통제하고 참견하면서 글씨기를 방해한다. 빅토르는 누나의 행동이 창의력, 생명력, 자유, 영감을 말살시킴으로써 모든 걸 파괴시킨다고 부르짖는다. 떠나겠다는 동생에게 먹여주고 재워준 대가를 지불하라면서 놓아주지 않는 누나. 결국 빅토르는 누나를 살해하는데, 그는 법정에서 자신은 그녀를 죽이지 않을 수 없었다고, 그것만이 책을 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고 호소하지만, 배심원들은 빅토르가 '이기적이고, 사악하고, 사회에 위험한 인물'이라고 결론짓는다. 작가는 빅토르와 페테르를 통해 하고자했던 말을 전하고 있다. 전체주의자들은 인민 개인의 죽음 따위는 괘념치 않는다. 현재의 우리가 다수자 중심 원칙을 당연한듯 아무렇지 않게 들이미는 것처럼. 개인적으로 유독 남는 인물은 페테르다. 그를 통해 우리는 사유와 부끄러움에 대해 자문하게 된다.






마침내 모든 진실이 드러난다. 

클라우스와 루카스 그들은 존재자인가 아니면 비존재자인가.

나이를 속이고 형제의 이름으로 살아온 남자, 다친 형제를 잃어버렸다는 무거운 죄책감과 책임감을 짊어지고 있으나 사랑하는 어머니로부터 비교당하며 인정받지 못한 채 자신의 인생이 쓸모없고, 무의미하고, 무한한 고통임을 받아들였던 남자. 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이도, 천둥벌거숭이로 살아야만 했던 이도, 지독하게 외로웠다. 아마 나뿐만이 아니라 독자의 가슴이 내려앉는 장면은 클라우스가 그토록 애타게 그리워하는 루카스를 눈앞에서 놓친 짧은 순간일 것이다. 그들이 그때 재회했더라면. 



작가의 모든 작품에는 자전적 요소가 깔려있다. 특히 <문맹> 에서의 언어와 문자, 그리고 기록에 대한 소리없는 처절함은 이 작품에서도 나타나있다. 루카스가 남긴 허구의 이야기가 과연 허구로만 읽히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그안에는 아고타 크리스토프가 말하고자 했던 모든 실질적 진실을 내포하고 있다. 인간성을 내다버리고 비도덕적인 협박과 폭력, 살인이 아니면 생존할 수 없는 세상임을, 허구의 힘을 빌어 말하고자함이 아니었을까.



소설은 전쟁과 혼돈의 시대에 정착하지 못하고 '개인'의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고 부유해야만 했던 이들의 처절한 외로움과 우울, 그리고 존재가 갖는 허무에 대해 말한다. 작가는 루카스에게 일말의 희망조차 남겨놓지 않았다. 


서로를 그토록 찾고자 했던 루카스와 클라우스. 네 식구는 죽음에 이르러서야 한 곳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책을 덮으면서 생각한다. 나는 무엇으로 존재하는가.




352.

"(...) 내 누나의 시체 하나만으로는 부족해서 거기에 내 것까지 보태야 하는 건가? 하지만 누가 그 두 번째 시체를 원하는 거야? 신, 그는 분명히 아닐 거고. 그는 우리의 육신을 필요로 하지 않아. 그러면 사회가 원하는 건가? (...)" 


381

"(...) 나의 벽은 나를 더 이상 보호해주지 못했어요. 벽은 나를 결코 보호해주지 못했어요. 벽의 견고함은 착각일 뿐, 벽의 흰색은 더럽혀져 있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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