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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디에 Nov 10. 2022

마고

한정현


"빛이 사라지면 너에게로 갈게" 


경성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피해자는 하버드대학 영문학 박사과정을 마친 후 귀국 사업으로 돌아온 교수 윤박. 잡힌 범인은 미군인데, 문제는 남조선에 친미 단독정권이 들어설 예정이기에 그가 범인이 되면 안 되는 상황. 그래서 경찰은 진범이 누구든 간에 범인을 피해자와 관계가 있는 세 명의 여자 용의자 중 한 명을 선택하기로 했다.







소설은 광복 직후 미군정이 시작된 1948년을 배경으로 한 남성 귀국 교수의 살해 사건을 종로경찰서 여성 검안의가 추적해나가는 과정을 추리소설처럼 진행하지만, 이 이야기는 사람과 여성, 그리고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주요 등장인물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아버지로 인해 좌익(빨갱이) 가족으로 낙인 찍힌 가성, 고아 출신으로 스스로 삶을 개척해나가는 송화, 아버지로부터 절연당하고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트랜스젠더 운서, 동성애자 안나와 경준(경아), 제3의 성이라 일컫는 간성인 등 현재에도 소수자 혹은 약자라고 칭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들과 대척점에 있는 이들은 강한 자에게는 약하고 약한 자에게는 한없이 강한 수사팀장 양준수, 미군 세력을 등에 업은 이중인격자 귀국 교수 윤박, 미국인 관점에서 조선을 바라보는 미군 대위 이든이 있다.






소설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혹은 논쟁 중인 쟁점들을 시대를 옮겨 아주 절묘하게 풀어놓고 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여성잡지를 만들고 싶어했던 선주혜가 에리카를 찾아와 모델 제의를 했을 때 두 사람의 의견이 엇갈려 불발됐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보여준다(옳고 그름의 차이가 아니다). 선주혜는 에리카에게 여성의 '아름다움' 을 강요할 수 없음을 대중에게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화장을 지워달라고 요구하지만 에리카는 여성들 자신 스스로 원해서 추구하는 의복과 화장은 찬성하기에 거절한다. 이러한 논제는 지금도 변함없이 하나의 담론으로 존재한다. 


또 하나, 운서와 가성의 서로를 향한 감정이다. 트랜스젠더와 좌익 여성의 사랑. 운서에게는 트랜스젠더라는, 가성에게는 좌익 집안 출신이라는 딱지가 문신처럼 새겨져 있다. 그들은 잘못한 것이 없음에도 누가 정했는지도 알 수 없는 '정상화'라는 잣대와 이념에 의해 혐오의 대상인데, 이는 21세기에도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물론 빨갱이라는 단어를 쓰지는 않지만, 우리가 사회주의를 바라보는 시선을 떠올려 보면 납득이 될 터다.)


그리고 가성이 모호해하는 '친구'에 대한 정의와 범위다. 어느 때부터인가 친구라는 말이 점점 더 듣기 어려워지고 있음을 체감한다. 요즘 십대 아이들을 보면 친구라는 말보다 classmate, 그야말로 한 반에 소속된 멤버 정도로 인식한다. 학원에서 저녁밥 같이 먹는 아이, 같은 수업을 듣는 아이, 동기 등 말 그대로 감정이 아닌 시간만을 공유하는, 때로는 같은 목표를 둔 동맹 사이다. 거기다 입시부터 취업까지 온통 경쟁적 구조를 이루다보니 나 살기 바빠 상대의 마음 따위를 헤아려줄 여유는 없다. 그렇다면 성인이 되어서는? 공감이 부재한 상태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이들이 성인이 된다고 해서 얼마나 달라지겠는가. 어차피 수익과 승진을 놓고 변함없이 경쟁하고 있는데. 가성의 말처럼 같은 학교를 나왔다고, 밥 한번 먹었다고 친구라고 이름 붙이기는, 그들 입장에서 어렵지 않겠나. 


먹고 살기 위해 지겹고 고달픈 화장을 안 할 수 없다는 송화의 푸념에서 불과 몇 년 전까지 우리의 모습을 본다. 출근하면서 화장을 하지 않으면 예의가 없다는 말도 무시로 들어왔던 시절. 설마 지금도 그러지는 않겠지? 월급생활자에서 벗어난 나로서는 명확히 알 길이 없다만. 


이처럼 소설은 마치 1948년이 아닌 2022년을 얘기하는 것처럼 현실감이 생생하다. 






<마고>는 인간의 이중성과 모순을 반복적으로 보여주며, 여성 및 성소수자의 서사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정도의 차이일 뿐 일본이나 미국이나 별반 다를 바 없고, 공식적으로는 여성의 권리를 위해 공창제 폐지를 외치며 아홉 시 통금을 발표한 미군정이 뒤에서는 밤늦게까지 요정집을 드나들며 어린 기생들을 공공재인 양 대하고, 앞에서는 여성의 권익에 앞장서면서 권력 세력에 기생해 여러 여성들에게 성 상납과 성추행을 관행처럼 일삼는 교수 등 끊임없이 이어져온 익숙한 모순과 부조리가 소설 곳곳에 나타난다. 오늘날에도 성폭행 사건을 들여다보면 피해자인 여성의 사생활까지 들먹이는 무지하고 후안무치 사람들이 아직도 있지 않은가. 


조선 땅에서 고아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건 권력자가 바뀔 때마다 다른 옷을 입어야 한다는 뜻이라며 내뱉는 에리카의 건조한 한탄이 딱히 낯설지 않은 이유를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언제까지 약자들의 연대를 운운해야 할까. '소수자', '약자' 라는 단어는 언제쯤이면 사용하지 않게 되려나. 운서의 말처럼 '가능성이 삭제'된 세상에서의 폭력은 얼마나 위험한지. 


연가성, 권운서, 에리카, 송화 등 이들은 연대, 그 이상의 사랑을 품고 살았던 사람들이다. '타인을 파괴하지 않고도 사랑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임을 이 소설을 통해 새삼 깨닫는다. 가성의 마지막이 될지 모를 발걸음은 친구요 연인을 향한 사랑이고, 약자를 향한 동료애이자 연민일 것이다. 



사족.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의 애신을 떠올리게 한다.



#마고

#한정현

#현대문학

#핀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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