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디에 Jul 06. 2021

불평꾼들




2003년 퓰리처상을 수상한 제프리 유제니디스의 중.단편 소설집이다.


작품들을 읽다보면 언뜻 필립 로스가 떠오르는데, 작가는 미국 시민 개개인의 일상적인 삶에서 오는 위기를 동시대에 고려해봐야할 사회적 문제들과 연관지어 풀어놨다. 노인 부양, 비혼모, 경제적 위기, 성 정체성과 그에 대한 관습 및 고정관념, 학업과 직업의 괴리, 고용 불안정 등 사회 구성원이라면 누구와도 무관하지 않은 보편적 문제들에 대해 풍자적이면서도 담담하게 썼다.







눈치 없는 두 남녀를 등장시킨 한 편의 코미디같은 [변화무쌍한 뜰]에서는 개인주의가 팽배해지면서 한 집 혹은 한 식탁에서 생활하고 공간을 공유하지만 정작 마음을 공유하지 못하는 현대인들을 꼬집고 있다. 그 연장선에 있어서, 사랑과 이해와 공감을 나누는 것을 소모적이라고 여기며 자식을 오로지 자기의 욕구를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 [베이스터]의 토마시나, 그리고 사랑과 결혼을 통해 자식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결과적으로 토마시나와 크게 다르지 않는 윌리 마스를 통해 감정이 결여된 인간 관계를 말한다.



[항공우편]에서는 명상을 통해 마음을 통제하는동양의 종교에 매료되어 순회 여행을 하고 있는 미첼에게 내면의 자아를 뒤로 밀어놓은 채 경쟁과 성공을 위해서 앞만 보고 달리는 현대인을 투영한다. 미첼이 그웬돌린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은 신비한 힘이 아닌 내면을 들여다보는 힘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팜베이 리조트]에는 도시 유목민을 볼 수 있는데 몸은 점점 노후되고 질병도 찾아오지만 여전히 삶은 녹록치 않다. 어디에도 열심히 살아온 인생에 대한 보상을 해주는 곳은 없다.



우리는 언제 생겼는지조차 모르는 사회적 관습이나 잣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신탁의 음부]는 양성 인간으로 태어난 펠리시티 케닝턴과 인도네시아 동쪽 끝에 있는 이리안자야의 다왓족을 통해 신체적 및 정신적 성性 정체성은 문화와 관련된 사회적 개념임을 말하면서 어떤 기준에서든 성 정체성은 대체로 선천적이거나 혹은 영아 시기에 결정됨으로써 개인의 선택이 아님을 말한다. 설혹 그렇지 않더라도 성소수자들을 억압하고 학대할 권리가 우리에게는 없다. 따지고 보면 성의 구분 역시 인류가 탄생하면서 다수의 무리가 세워놓은 잣대에 불과하지 않은가. 소아성애와 강간같은 강력범죄만 아니라면 어떤 성의식에도 개방적이라고 자부하는 루스 박사도 정글의 소수 부족의 성문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처럼 문명인이라고 자부하는 현대인들 또한 다수의 무리가 속해 있는 성에 대한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넘어 타인의 성 정체성까지 강제한다. 이는 [신속한 고소]에서 스스로 성범죄 피해자가 되게 만드는 여성차별까지 아우른다.




[고음악]과 [불평꾼들]에서는 사회에서 무용지물로 전락한 계층이 등장한다. 음학학 석사 학위까지 취득한 부부가 경제적 어려움으로 음악과는 전혀 무관한 일을 하면서, 이는 일시적인 임시방편일 뿐이며 그럭저럭 괜찮은 일이라고 스스로를 세뇌시키지만 음악학 전문가로서 음악을 하지 않는 자신들이 사회에서 미미한 존재임을 모르지 않는다. 하고 싶은 것을 포기 하고 생계 전선에서 더 많이 벌기 위해 사투를 벌이지만 현실은 베이비시터 고용 비용이 부부의 수입보다 더 크다. 학업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결혼하지 않았다면, 아이를 낳지 않았다면 지금과는 다르게 살고 있을 거라고 자조하는 레베카의 모습이 낯설지 않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우리는 인생에 막연한 기대를 걸며 살고 있다.



격동의 시대에 경제 고성장을 거치며 살아온 세대들은 경제적 성과를 이룬 것에 대한 남다른 자부심을 갖고 있지만 노년이 되어서 자식들에게 비용의 존재가 되어버렸다. [불평꾼들]에서 델라의 아들들은 치매 초기 진단을 받은 늙은 어머니를 좋은 시설로 옮길 수는 있지만 함께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캐시가 델라를 양로원에서 데리고 나와 델라의 집으로 데려다 주고 함께 사는 이유가 젊은 시절, 가족과 제대로 친밀감을 쌓지 못한 것에 대한 보상심리였을까? 인디언들은 삶의 지혜와 생존에 필요한 지식을 전수하는 노파들을 남겨두고 떠나지 않는다고 한다. 현대인들이 늙은 부모를 남겨두고 떠나는 원인은 늙은 그들의 인과응보일까, 아니면 삶이 팍팍해지는 사회적 현상일까?



[위대한 실험]의 주인공 켄들이 부정을 저지르지 않고 정직하게 6년간 근무하면서 고용주 지미에게 요구하는 것은 단 하나 의료보험가입이었다. 그러나 지미는 실직을 무기로 일언지하에 거질한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조지 부시 대통령 정부를 비판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후기자본주의에서 신자유주의로 넘어가면서 극심하게 벌어지는 빈부격차와 불평등을 지적한다. 민주주의 안에서 평등을 말하건만 현실은 봉건세습제와 다를 바 없는 경제구조. 세계의 모토는 부자되세요지만, 사람들은 부모 세대 즉 이전 세대만큼 경제적 안정을 추구하기가 더 어려워지고 있다. 갈수록 먹고사니즘에 매달려야 하고 노력만으로는 원하는 삶을 살 수 없다는 인식이 뚜렷하다.



도시 재생을 명분으로 낡은 집들을 헐고 변화하는 시대에 새로운 주거 공간을 만들지만 모든 사람이 원한다고 그곳에서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기회 불균등 상황에서 횡령과 회계 부정을 막기 위해 도덕성과 정직만을 강요한다고 해결될 일일까? 결국 복권이든 부동산이든 주식이든 인생의 강력한 한 방을 꿈꾸며 살 수 밖에 없는 사람들. 심지어 정부는 법 테두리 안에서 도박을 부추기기까지 한다(국가에서 일확천금을 부추기다니!). 소설에서 약자에 속하는 켄들은 부정조차 저지르기 어렵다. 작가는 금권정치 국가를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작가의 말에 의하면 사랑이란 돈도, 자식도, 비슷한 인생관도 아닌 서로의 상태를 확인하고 살펴 주는 것, 서로에게 소소한 친절을 베푸는 것이이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잠시 손을 잡아 주는 것, 오늘 하루는 어땠는지 안부를 물어주는 것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현실은 따뜻한 마음과 위로만으로 살아남기에는 너무나 거칠고 폭력적이다. 더 큰 이해와 예의가 필요하다.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는 예의, 공정과 평등을 지킬 줄 아는 예의, 양심을 지킬 줄 아는 예의 말이다.



필립 로스에게 낭만이 있다면, 제프리 유제니디스에게는 번득이는 날카로움이 있다. 

격하게 공감하며 읽었다.




작가의 이전글 카르마 폴리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