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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디에 May 07. 2021

카르마 폴리스

홍준성 / 은행나무



"자, 이제 천국으로 갈 시간이야!" 



이야기는 온 우주가 책장 속에 담겨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어느 고서점의 주인인 꼽추로부터 시작된다. 사람들이 더이상 책을 찾지 않는 고서점의 참 주인은 책벌레들이다. 책벌레를 잡아먹던 어느 박쥐는 송골매에게 사냥 당하고, 그 송골매는 고양이로부터 공격당해 모두 죽고만다. 문을 닫은 서점의 보일러실에서 동물의 사체를 발견한 노숙자는 박쥐는 약제상에게, 송골매는 박제상에게 푼돈을 받고 판다. 퇴행성 관절염으로 고생하던 유리부인은 약제상으로부터 말린 박쥐를 사서 달여 먹고 뜻하지 않게 임신을 한다. 어느날, 대책없이 쏟아진 대홍수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죽었고 이때 유리부인의 아들 42호는 극적으로 살아난다. 역사는 반복되는 우연의 연속으로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벤자민 버튼이 말했던 것처럼, 만약 그랬다면 그들의 운명은 어땠을까?








일단 이 소설은 기발하다. 고전 문학과 철학부터 역사, 현대의 대중문화까지 아우르는 텍스트를 절묘하게 인용하고,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햄릿을 비롯한 셰익스피어의 작품들, 향수, 신곡, 레 미제라블, 찰스 디킨스의 다수 작품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카프카의 그로테스크한 음산함, 마르크스의 자본론 등이 연상되는 상황 묘사를 능수능란하게 다루고 있어 무척 흥미로웠으며 몰입도 역시 최상이었다. 재미있는 점은 작가가 시간적 배경에 제약을 두지 않았다는 것인데, 소설에서 언급되는 시대는 12세기지만 중세와 근현대를 모두 범위 안에 두고 있다. 가시여왕이 다스리는 비뫼시는 제정시대, 그러나 근대 산업화와 과학기술이 등장하는 현대까지 이동전화를 제외하고 현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고 소설은 빈민촌의 묘사, 시체들의 분노, 가시여왕을 비롯한 기득권층의 권력싸움으로 나뉘기도 하는데, 이 광범위한 문헌의 틀 안에 작가는 풍자적이고 우화적인 방식으로 한국의 근현대사를 그대로 투영시킨다.


비뫼시는 가시여왕의 궁전이 있는 언덕과 북쪽 외곽으로 나뉘는데 두 지역 사이에는 도개교가 있어서 북쪽 외곽의 빈민촌은 격리된 지역과 다를 바 없다. 공급과잉과 대규모 실업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가시여왕이 지시한 볼던 댐 건설은 비용을 줄인 최악의 부실 공사였고, 느닷없이 찾아온 대홍수로 인해 결국 무너지고 만다. 이를 시작으로 방치된 비뫼시 북쪽 외곽 지역은 가시여왕의 개인적 욕망과 탐욕, 그리고 조작된 언론 흘리기와 집단의 광기가 더해져 혼돈의 구덩이가 되어버린다.


가시여왕의 궁전에서 열리는 회의는 주로 교육 예산 줄이기, 생산량 규제 풀기, 하수도 정비사업 보류, 군징집 인원 미달 사태 대책 방안, 총선 시나리오, 높아진 범죄 통계율 조작과 신설 교도소 설립 등 기득권층의 권력을 지키기 위한 속임수에 대한 논의다. 가시여왕의 주요 책무란 결국 폭동이나 혁명 등 극단적인 사태로 치닫지 않게 위기를 관리해 주는 것, 즉 도시를 견딜만한 지옥으로 유지해 주는 것이다. 최고 권력자는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서슴없이 폭력과 살인을 지시한다. 괴담보다 더 끔찍한 현실이 그곳에 있다. 연구를 위해 시체를 매매하고 가난해서 시신 인수를 거부하며 구덩이의 시체를 보면서 느끼는 감정은 절망감이 아닌 피로감이다.


소설의 중심에 있는 42번 아이와 여왕의 친아들은 둘 다 박쥐와 닮은 얼굴을 갖고 태어났는데 42번은 청각 장애를, 여왕의 아들은 시각 장애를 안고 있다. 유폐된 왕자와 왕자의 대역으로 들어간 42번의 비극과 비뫼시 북쪽 외곽의 빈민들은 약자로서 같은 선상에 놓여 있다.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두 왕자(대역)는 가시여왕으로부터 버림받고 이용당하는 빈민들과 다름하지 않다.


그렇다면 왜 카르마인가?

타고난 성정 탓도 있겠지만 가시여왕의 폭력적인 성향은 아버지인 선왕의 변태적이고 기괴한 행위에서 강화됐다. 유리부인이 박쥐를 달여먹지 않았다면, 약제상이 장삿속으로 퇴행성관절염에 효과가 없는 말린 박쥐를 유리부인에게 팔지 않았다면, 노숙자가 박쥐를 약제상에게 팔지 않았다면, P수사가 고아원 아이들을 학대하지 않았다면, 선왕이 폭정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여왕이 아들을 사랑으로써 보살폈다면, 젤링거 박사가 오지랖을 부리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이 지옥같은 응보는 일어나지 않았을까? 알 수 없다.


소설에서, 혼돈에 빠진 비뫼시의 아비규환의 원인을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현실의 우리는 원인을 알아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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