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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디에 Feb 15. 2021

빈 옷장

아니 에르노


타인들, 교양 있는 사람들, 선생님들, 예의바른 사람들, 나는 이제 그들 역시 증오한다. 지긋지긋하다. 그들에게, 모두에게, 문화, 내가 배웠던 모든 것에 구역질이 난다. 나는 사방에서 농락당했다.




부모님이 식료품점과 카페를 겸한 가게를 운영하는 덕분에 드니즈 르쉬르는 어린시절부터 요양원에서 오는 늙은이들, 타이피스트, 공사장 인부들, 도로 정비공들, 동네 여자들, 그리고 도시 건너편에서 온 낯선 남자들 등 다양한 사람들을 접한다. 친딸과 다름없다며 다정하게 구는 사람들, 어린 소녀를 무릎에 앉히고 예쁘다는 칭찬과 함께 얼굴을 부벼대는 남자들, 밤이 되면 잔뜩 취한 손님들과 밤새도록 이어지는 그들의 대화 속에서 장학금을 놓치지 않는 우등생으로 성장할 것이다. 소녀는 자신이 어머니와 함께 방문했던 가난하고 병들고 굶주리고 지저분한 사회 밑바닥 계층 사람들의 딸이 아님을, 자신이 드니즈 르쉬르임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매일 원피스를 입고 먹고 싶은 것은 다 먹을 수 있어서 풍족하다고 믿었던 그 시절, 그런 불행은 자신에게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먼 불행으로써 그런 불행을 위한 사람들은 따로 있다고 여기며 안도했다. 








부모의 기대와 희망을 안고 사립학교에 입학했다. 성적부터 행동거지까지 모든 게 걱정인 부모와 달리 드니즈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가죽으로 된 책가방, 최고로 좋은 칠판과 분필, 필요한 것을 모두 가지고 있었으니까. 첫 등교일. 정작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던 아버지는 딸을 데려다주기 위해 도착한 학교에서 어디로 가야할 지를 몰라 서글펐고, 놀이와 장난들이 난무한 학생들 사이에서 전학생인 드니즈는 혼자였으며, 그녀는 자기가 드니즈 르쉬르가 아닌 한때 무시했던 이웃 소녀 '모네트 마르땅'이 되었다.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어진 자유의 결핍, 그러나 드니즈는 선생님이 하라고 하는 것을 아주 잘 수행하는, 학교를 빼먹는 따위의 짓은 생각하지도 않는 모범생이 되었다. 학교는 식료품점, 부모님, 마당의 친구들과는 완전히 다른 아주 낯선 느낌이었다. 선생님의 언어는 집에서 들어왔던 생생하게 살아있는 언어 대신 가볍고 형태가 없으며 온기가 없고 단호한, 불편함과 충격이었고, 선생이든 학생이든 모두가 '척하는 것'을 즐겼다. 즐거운 척, 웃긴 척, 관심있는 척, 흥미로운 척. 드니즈는 강박적으로 늘 다른 사람들처럼 하고 싶었다. 그렇게 '척' 하면서. 비로소 자신이 가졌던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소녀에게는 풍요의 상징이었던 식료품이 비웃음의 대상임을, 드니즈 르쉬르는 아무것도 아님을, 알게 된다. 모욕과 수치심을 배운 그 시절에 그녀에게는 두 개의 세상이 존재했다. 드니즈는 1등이었고 그녀를 비웃었던 '그 소녀'들은 5학년을 통과하지 못했으나 스무 살에 낙태 전문 산파 집에 널부러져 있지도 않았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때에는 아무도 본받을 사람이 없었다. 


사춘기에 접어든 드니즈에게 있어 가장 아름다운 발견은 독서와 어휘와 문법이었다. 예의바르고 어여쁜 아이들에게는 형제자매가 있었으며 두루 갖춰진 큰 집에서 조화로운 삶을 살고, 부모는 저녁에 돈을 세지 않으며 다투지 않고, 주변에는 술 취한 사람이 없다. 그들이 존재하는 책 안에는 드니즈의 주변 사람들처럼 말하지 않고, 표현하지 않는다. 드니즈는 작문을 통해 새로운 드니즈 르쉬르를 창조했다. 그 언어는 어색하고 인위적이고 눈속임에 불과했고, 부모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야말로 유일하게 진짜 언어였다. 그러나 드니즈는 성적이 오르고 모두의 기대가 커질수록 다른 사람이 되기를, 자기의 부모가 다른 사람이기를 바랐다. 그녀는 점점 더 가정에서 멀어졌고 잠들었으며 부재했다. 그녀가 잠들다 깨어나는 곳은, 장학금을 받고 최우등생에 위치한 학교에서다. 여자애들은 더 이상 드니즈를 모욕하지 않는다.



"내 부모님이 다른 사람들처럼 되도록 바꿔 주세요..." 








'공부하는 아이'가 된 드니즈는 더 이상 가게 일을 돕지 않는다. 그녀는 열두 살부터 자신만의 계산법을, 평가 시스템을 만들어 좋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누어 비교를 했다. 좋은 사람은 차와 서류 가방, 레인코트를 갖고 있고 손이 깨끗하며 상황에 따라 항의하고 반박할 줄 아는 사람이다. 좋은 여자들은 길에서 떠들지 않고 다른 이보다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며 시내에서 장을 보고 청결하다. 드니즈는 이러한 차이가 돈에서 나온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타고난 것이라고 믿었다. 그녀는 자신의 부모를 어느 쪽에도 두고 싶지 않았으나 결국 사회적 위치가 높은 사람들 앞에서 그들이 초라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자기의 부모는 카페에 오는 손님들보다 우월할 뿐이었다. 그들은 작은 소매상이자 동네 카페 주인, 여행 한 번 해보지 못한, 벌이가 변변치 않은 사람들에 불과했다. 


드니즈는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집에 가는 일이 끔찍해졌다. 누런 외관, 문 앞에 쌓여 있는 상자들, 오래 전에 판매했던 굵은 소금 냄새, 자신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손님들의 시선. 진짜 가족이란 백발 머리를 깔끔하게 손질한 조부모가 잼을 만들고 손주들을 데리고 산책을 하는 것이지, 사투리를 쓰고 세탁과 수선을 하다가 요양원에서 죽는 것이 아니었다. 공장 노동자이며 인부인 친척들은 진짜 가족이라고 할 수 없다. 그녀의 부모는 점잖지도, 피크닉을 가지도, 낚시를 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부끄러운 줄 모르고 저속한 말을 쓰며 게걸스럽게 먹는다. 그렇게 끔찍하고 형편없고 막돼먹은 사람들이 친척이자 가족이라니. 드니즈는 자신의 모든 수치심을 가족의 탓으로 돌린다. 그녀가 아무리 조심해도 부지불식 간에 그들의 언어가 튀어 나온다. 부모는 드니즈를 점점 더 자랑스러워했고, 그녀는 부모를 미워하지 않았지만 점점 더 부끄러워했다. 드니즈는 안다. 자격증도, 상장도 없는 두 사람은 오직 그녀의 성공과 행복만을 원한다. 그렇기에 드니즈는 자신의 배은망덕에 눈물이 차오른다. 있는 그대로의 부모를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다. 


137.

열네 살, 세상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었다. 내 부모에게, 내 주변 사람들에게 나는 이방인이었다. 더는 그들을 보고 싶지 않았다. 유일하게 그들과 다시 가깝게 느꼈을 때는 미움 혹은 죄책감이 터져 나왔을 때뿐이었다.  




청소년기에 접어든 열다섯 살 아이들에게 더이상 성적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음악, 예술, 남학생, 패션, 파티를 이야기하는 여자애들 사이에서 드니즈는 이야기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그녀는 개의치 않는다. 문제없이 졸업장을 받았고 사립 학교의 삼 년이 남았고 대학을 가게 될 것이다. 고등학생이 되자 드니즈는 어머니가 그토록 강조하는, 더 이상 '몸가짐이 바른 여학생'으로 남지 않았다. 그녀는 가정이 좋은 '괜찮은' 남자를 골라 데이트를 했고 어머니가 사주는 책이 아닌 자기 만의 소설을 샀다. 그 '괜찮은' 남자가 자신을 다른 세상으로 데려가 줄 것이다.


157-158.

알아야 할 게 있는가? 최신 유행하는 재즈, 어디서 배우나,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단어들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바보 같은 놈! 그래도 내가 널 이겨 먹을 거다! 절대 놓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얼간이라면 어쩔 수 없지. 다른 사람이 되려면, 가벼운 연애를 하면서 잘난 척을 하려면 그를 잡아야 한다...... 내 열등감을 삼킨다. 나는 일주일 내내, 몸에 꼭 끼이는 어머니의 더러운 블라우스를, 아버지의 면도 거품이 떠다니는 세면대를, 엉망으로 진열된 완두콩 통조림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던 모든 것들을 보고 또 본다. 빨강 머리의 그 날카로운 눈이, 그가 봤다면, 그가 상상했다면...... 그에게 나는 생 미셸 고등학교의 학생, 드니즈다. 나는 그것이 전부다. 나머지는 모두 겉으로 드러난 것이거나 틀린 것이다. 식사 시간이나 카페를 지나가는 일처럼 견디기 힘든 순간들이 있다. 저녁이 되면 더러운 접시로 가득 차 있는 식탁에 앉아 시럽이 들어간 껌과 낱개로 파는 비스킷을 쑤셔 넣으며, 나의 구원을 찾는다. (...) 이 뜨거운 연애는 정성을 들여 이룬 분명한 나의 승리가 될 것이다. (...) 내가 누구와 함께 있는지 잘 보렴, 나는 드니즈 르쉬르다. 그녀가 너희들과 다르다는 증거를 이제 봤지 않은가. 그러나 식료품점 세계에서만 이룬 승리만은 아니다. 




딸의 연애를 알게 된 부모는 분노했다. 어머니는 윤리적인 문제를 들어 딸을 창녀 취급했고, '공부하는 아이' 외에는 용납하지 않았다. 남자애들과 어울리는, 자유롭고 행복한 드니즈는 있을 수 없었다. 그녀는 착하고, 얌전한 딸로 돌아와 바칼로레아를 통과 했으며, 어머니는 그녀가 선생님이 될 거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말했다. 딸은 제자리로 돌아왔고 철저히 감시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까? 카뮈와 카프카, 사르트르와 시몬느 드 보부아르, 말로를 읽는 열열곱 살 딸을 언제까지 감시할 수 있을까? 그녀는 어머니의 감시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바칼로레아를 통과했고 대학생이 되었다. 드니즈 르쉬르, 어디든 편안하게 돌아다니며 세상에 무관심하고 아무도 부러워하지 않는 자유로움. 학위 예비 과정에 합격했고, 문학 교수 자격증을 갖게 될 것이며 시몬느 드 보부아르처럼 되리라. 그리고 닮고 싶은 남자와의 연애와 첫 경험, 그 사람과 결혼할 거라는 막연한 희망과 그로인한 행복, 그리나 8개월 연애의 끝, 임신과 낙태.










책을 덮으면서 이전에 읽었던 <남자의 자리> 에서 작가가 정식 교사가 된 후 정확히 두 달 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문장이 떠올랐다. 소설은 스무 살 드니즈가 낙태 수술을 받은 후 대학 기숙사에서 어린시절부터 현재까지를 회상하며 기록한 글로써 소설의 첫 장면은 그녀가 낙태 수술을 받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고 한때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우월감마저 느꼈던 어린 시절에서 벗어나 더 나은 계층에 속하기를 바라는 부모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사립 학교에 다니게 되면서 자신의 가정 환경이 얼마나 볼품없고 초라한지를 깨달으며 가족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욕망과 그 욕망을 이루기 위해 태생 자체를 지우고 싶어했던 한 여성, 드니즈 르쉬르의 이야기다.  


이 과정에서 드니즈는 가족으로부터 자신을 떼어내기 위해 스스로 세계를 둘로 나누는데, 표면적으로는 벗어나고 싶은 식료품점 세계 즉 가족과 자신의 신분을 상승시켜줄 수 있는 학교로 보이지만, 사실 그녀가 머무는 모든 공간이 분리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먼저 학교는 앞에서 언급했듯 상류층 사회로 진입할 디딤돌 역할을 해주기도 하지만 그녀에게 모멸감과 수치심을 안겨주는, 억압적인 공간이다. 가정은 자신에게 수치심을 갖게 만든 근본적인 원인이자 부끄러운 존재로써 벗어나야할 대상임과 동시에 부모의 경제적 지원에 대한 채무감과 '바른 품행'과 '성공'을 강요하는 부담스러우나 한편으로는 연민의 존재이기도 하다. 이렇듯 십대인 드니즈는 모든 생활에서 양가적인 감정에 혼란스러움을 겪었을 것으로 느껴졌다.


그렇다면 독자는 한 개인이 교육 현장에서 느끼는 수치심을 소설 속 허구, 혹은 작가의 지극히 사적인 경험으로 치부하면 그만일까? 현재 우리나라 교육 격차는 아니 에르노가 느꼈을 수치심과 다름하지 않다. 유치 단계에서부터 시작되는 사교육 시장과 평준화되지 못한 공교육 현장은 대다수의 학생과 부모들이 좌절감을 맛본다. 아이는 부자가 아닌 부모를 원망하고, 부자가 아닌 부모는 자신의 무능함에 고개를 숙인다. 소설에서 드니즈가 학벌과 결혼을 통해 신분 상승을 꿈꾸는 것 역시 현실과 전혀 무관하지 않다. 이처럼 아니 에르노는 자전적 체험을 통해 가족의 분열과 사회 격차와 집단의 문화가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생생하게 짚어내고 있다.  


그런데 왜 '빈 옷장'일까? 일차적으로는 상대적인 의미가 아닐까? 드니즈의 어린 시절은 '빈 옷장'이 아니었다. 다른 아이들은 일요일에만 입는 원피스를 그녀는 매일 입었고, 부족함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마당에서 함께 뛰어놀던 모네트에 비하면 자신은 똑똑하고 풍족한 아이였다. 그런데 사립학교에 들어가보니 그녀는 가진 것이 없었다. 엘리트 부모, 품위있고 다정한 조부모, 멋진 차, 음악과 미술을 통한 교양 등 그녀의 옷장은 텅텅 비어 있었다. 이는 소설의 첫 장면인 낙태 수술과 이어져 있다. 그녀가 그토록 바라던 삶의 목표에 도달하려던 순간 낙태로 인해 자궁은 찢기고 비워졌다. 이것이 작가가 말하는 '빈 옷장의 폭력성'이라고 이해했다. '빈 옷장의 폭력성'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사족.

책을 읽다보니 책 표지가 왜 보라색인지를 알겠더라는. 소설 속에서 보라색 얼굴, 보라색 혀, 보라색 사탕이 언급되는데 비루한 생활을 표현해주는 색깔이었다. 보라색이 억울할 일이다.






#출판사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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