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만나던 날,
엄마는 내게 남편과의 관계가 괜찮은지
걱정스레 물어왔다.
아빠와 늘 마찰을 빚어온 엄마였기에,
내 결혼생활이 걱정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너무 행복해.
우리 진짜 한 번도 안 싸웠다?
뭐든 말로 풀 수 있어.”
나는 기쁜 마음으로 대답했다.
그런데 그 순간,
엄마의 얼굴이 아주 잠깐— 0.1초쯤,
아주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그 기색에
나는 잠깐 숨이 멎는 기분이었고,
그 기색에 스며든 감정을
나는 ‘질투’라고 느꼈다.
질투라는 표현은 사용하기에 조심스러웠다.
너무 단정 짓는 건 아닐까 망설였지만,
그 순간의 마음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단어는
그것 뿐이었다.
타인에게서조차 상처가 되는 감정인데,
그게 엄마에게서 느껴졌다는 사실은
왠지 더 깊게, 뾰족하게 가슴에 박혔다.
“엄마가 나를 질투할 리가 없잖아...”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내 감정을 부정하려 애썼다.
그건 내가 잘못 느낀 거라고,
내가 너무 예민한 거라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스스로 느낀 마음을 외면하는 일이
가장 나를 갉아먹는 일이라는 걸.
외면했던 감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날의 순간은,
미움으로, 상처로,
내 안 어딘가에
아주 조용히 스며들고 있었다.
한동안,
엄마에게서 알 수 없는 감정이 느껴졌다.
견제처럼, 질투처럼—
그 모든 말들이 나를 향해 조용히 날아들었다.
결혼이 생각보다 좋다고 말했을 때,
“결혼 좋은 거 다 한순간이다.
두고 봐라. 나중에 어떻게 되는지…”
이사를 간다고 했을 땐,
“그 동네로 가서 잘된 사람 하나도 없다더라.
가지 말지…”
반영구라는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다고 했을 때,
“요즘 경기 안 좋아. 그거, 잘 안된대…”
처음엔,
엄마의 말이 더 넓은 삶을 살아온 사람이
해주는 조언이라 믿고
그 말을 새기며 조심하려 애썼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말들은 나를 위하는 조언이 아니라,
내 걸음을 묶는 족쇄처럼 느껴졌다.
엄마의 말을 들을수록
나는 늘 조심해야 하는,
불안정하고 위험한 존재가 되어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그 말들 속에서 사랑보다는
미묘한 견제가 느껴졌다.
걱정으로 포장된 말들이
어느새 저주처럼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속상한 마음과 함께
반항심 섞인 질문이 피어올랐다.
“조금만.. 정말 조금만이라도
내 선택을 응원해 줄 순 없는 거야?”
나 또한,
늘 남과 나를 비교하며
그 속상한 감정 자체에 괴로움을 느낀다.
누군가 내가 꿈꾸던 걸 먼저 이뤄낸 모습을 보면
마음이 툭, 꺾이는 순간이 있다.
그리고 그런 순간마다—
진심만으로 축하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못나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질투와 비교의 감정이 올라와도,
그 이면에는
정말로 축하해주고 싶은 마음도
함께 있었다.
그래서일까.
나의 선택들이
정말 조금이라도
격려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그 외면이
더 불안했고,
더 속상하게 다가왔다.
시간이 한참 흐른 어느 날,
나는 남편과 함께
내 안에서 올라오는 ‘질투’에 대해 이야기 나누었다.
“질투라는 감정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르겠어.”
나는 조심스럽게 털어놓았다.
그러자 남편은
“질투가 난다는 건,
그 사람이 네게 멋있다는 뜻이고,
반대로 네가 질투를 받는다면
그만큼 너도 누군가에게는 멋져 보인다는 거 아닐까?”
하고 말했다.
“질투를 느낀다면
내가 더 잘하고 싶은 게 뭔지 알게 되는 거고,
질투를 당했다면
내가 이미 그만큼 잘하고 있다는 뜻일 수도 있어.
굳이 그 감정에 상처받거나
상처 줄 필요는 없을지도 몰라.”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내 감정을 단단히 끌어안아주길 바랐던 마음에
조금은 서운했다.
하지만 지금—
가족과 거리를 만들고,
묻어두었던 마음들이 조금씩 옅어지고 있는 요즘,
그때 남편이 해줬던 말들이
시간이 흐르며 조용히,
다시 내 안을 맴돌고 있다.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말들이
이제야 천천히,
나를 덜어내기보단
나를 채워주는 말이 되어 다가온다.
서운함 너머에 있던 온기를
나는 지금에서야 느끼고 있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세상을 해석하며 살아간다.
행복한 결혼을 해본 적 없는 엄마가
내가 너무 행복하다고 말하는걸 들었을때,
그 말을 기쁘게 믿고 축하해주는 일이
과연 쉬웠을까.
엄마의 지인들이
내가 이사 간 동네에서 불행을 겪고 있다면,
그 동네에 살게 될 나를 향한 걱정은
어쩌면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을까.
엄마 친구가
반영구 업을 힘겹게 이어가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면,
내 도전을 불안하게 바라본 것도
엄마의 자리에서는 당연한 반응이었을지도.
엄마는
날 질투하려 했던 게 아니라—
그저, 당신이 아는 방식으로
나를 지키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더 나은 삶을 겪어내본 적 없었기에,
엄마는 더 나은 말을 건넬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질투’ 또는 ‘견제’ 라고 받아들였던 감정은
어쩌면, 엄마가 건네줄 수 있었던
가장 서툰 방식의 응원이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행복하다고 말했던 그날,
엄마의 얼굴 위로
0.1초간 스쳐간 미묘한 떨림이 있었다.
그건,
딸의 행복에 대한 안도,
그러나 그 행복이 오래가지 않을지 모른다는
불안의 그림자였을지도 모르겠다.
한때 사랑이라 믿었던 것들이
자신을 아프게 했던 기억들,
그러나 상처받고 싶지 않았던
엄마의 마음,
‘행복’ 이라는 단어 앞에서
엄마로서의 마음과
딸로서의 마음,
그 모든 감정이
순간 겹쳐져 엄마의 얼굴 위로
소리 없이 지나간 건 아니였을까.
나는 그 표정을
‘질투’라 단정지었고,
그 감정에 스스로 깊게 베이고 말았지만—
지금에 와서야
그 짧은 떨림 속엔
말로 다 풀어낼 수 없는
수많은 마음들이
겹겹이 얹혀 있었던게 아닐까
조심스레, 아주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사실은,
엄마의 그 걱정 어린 말들이
나를 향한 것이 아니라—
엄마 스스로를 향한 것이였던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그런 나의 이성적 해석과는 다르게,
마음은 여전히 쓰라림을 느낀다.
왜일까.
내가 엄마였다면,
내 미묘한 감정을 알아채고
자식과 소통하려는 노력을 했을 것 같고,
상처를 물려주지 않기 위해
어떻게든 그 상황에서 빠져나오려 애썼을 것 같고,
두려움이 나를 붙잡을 때면,
자식에게 무엇을 남기고 싶은지 고민하며
그 생각 하나로 용기를 냈을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모든 ‘나였더라면’ 하는 상상속에서 피어난
내 가치관들은
결국 엄마가 나에게 준
경험들 속에서 자라난 것들이다.
그리고 그 경험들 덕분에
나는 스스로를,
그리고 타인을
조금씩 더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그래서 감사한 마음이 드는것도 사실이다.
여전히,
나는 슬픔을 느낀다.
하지만 이제는—
엄마를 원망하며
아파하기만 하는 건
멈추고 싶다.
엄마에게 느낀 감정을
스스로 부정하며
조용히 스스로를 갉아먹었던 것처럼,
감사의 마음마저 외면한다면
또다시 나를 잃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나는,
감정을 ‘맞고 틀림’으로 나누지 않기로 했다.
슬픔과 고마움이
함께 존재할 수 있다는 걸
조금씩, 배워가보려 한다.
대신—
그 모든 시간들이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선에서,
엄마를 조금 더 깊이 이해하고,
결국은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기를—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