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를 지키기 시작했을 뿐인데
엄마의 아픔, 나의 무게
“그래도 엄마는 속 터놓을 곳이 나뿐일 텐데...”
“그래도 이건 엄마가 나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이러다간 내가 병나겠어.”
몇 차례 더,
엄마가 쏟아낸 감정의 오물을
그대로 뒤집어쓰는 경험을 한 뒤,
나는 며칠을 고민하다 결국 결심했다.
엄마에게 더는
아빠 이야기를 내게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기로.
엄마가 싫어서가 아니었다.
나는, 나를 지켜야 했다.
엄마를 위해
나를 포기하지 않기 위해서.
“엄마가 아무리 싫어도, 아빠는 내 생물학적 아빠야.
그런 사람을 욕하면,
내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는 기분이 들어.
그러니까, 이제 아빠 이야기 나한테 하지 마.”
“이야기할 곳이 너밖에 없어서 그런 건데...
알겠다. 안 할게.”
엄마의 목소리엔
서운함과 서러움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더 이해심 깊게 다가가지 못한 나 자신을 원망했고,
좀 더 다정하게 마음을 전하지 못한 게
자꾸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 모든 말과 행동은
그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응어리진 마음은
가시 돋친 말이 되어 날아갔고,
아프던 감정은
엄마가 아닌 ‘나’를 지키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때의 ‘최선’이 정말 최선이었는지
끝없이 반추하며 나 자신을 몰아세우고 있었다.
-
그런 내게, 남편은 말했다.
“자기가 없으면, 어머니는 또 다른 사람을 찾아
이야기하시겠지.
아니면... 두 분이서 직접 해결하시든가.
나는 지금 이 선택이 최선이라고 생각해.
잘하고 있어.”
-
편안함이 불러온 오래된 상처들
그렇게 또 일상을 이어가던 어느 날,
문득 궁금해졌다.
왜 남편과 남은 인생을
함께하기로 마음먹은 이후로는
그간 별문제 없이 지나왔던 부모님과의 관계가—
점점 더 서운하고 버거운 감정으로
다가오기 시작했을까?
동시에, 남편이 의심스러워지기도 했다.
이전의 연애처럼
혹시 내 감정이 또다시 조작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그를 조심스럽게 바라보던 때도 있었다.
가끔은,
그를 바라보는 순간
왠지 모르게 무서운 기분이 스치기도 했고,
이상하게도 그럴 때마다
엄마에게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익숙한 고통이,
낯선 안전보다 편안하게 느껴지는것 처럼.
그러면서도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지금이야말로
‘진짜 내 편’을 만나게 되면서,
그동안 미처 바라보지 못했던 상처들이
조용히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는 건 아닐까?
시간이 흐르고
차차 마음이 느슨해지자,
억눌러 두었던 감정들이
하나둘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건 남편 때문이 아니라,
그의 사랑 덕분에
비로소 나 자신을 들여다볼 용기를
조금씩 얻게 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과정은 혼란스럽고 낯설었다.
내가 느끼는 이 의심과 불안이
정말 그를 향한 감정인지—
아니면
‘사랑이라는 것을 믿으려는 나 자신’
에 대한 두려움인지
자꾸만 헷갈렸다.
가끔은 이런 질문이 날 붙잡았다.
‘나는 정말 사랑받아도 되는 사람일까?’
그 질문 앞에 설 때면,
마치 따스한 햇볕 아래에서도
등 뒤로 서늘한 바람이 스며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
사랑을 가늠한 건, 낡은 잣대였다
그래서였는지,
나는 남편이 제안하는 방향으로
쉽게 따라가지 못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가족 문제란 어떻게 해서든
정면으로 마주보고 풀어내야 한다’는 믿음이
내 안에 단단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남편의 가정은
어머니 한 분이 두 남매를 혼자 키워낸 집이다.
남편은
아버지를 미워했지만 증오하지 않았고,
결핍이 있었다고 말하면서도
그 누구도 탓하지 않았다.
그저,
어렸을 적부터의 꿈이
‘좋은 아빠가 되는 것’이었다고 담담히 말하던 사람.
지금도 그 말은 내 마음에 잔잔한 울림으로 남아 있다.
돌이켜보면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때의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 또한 '온전하지 않은 가정'
에서 자란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래서였을까.
끊임없이 좌절되는 노력의 반복 속에서도,
남편의 말이 옳다는 걸 마음 깊숙히 느끼면서도
쉽사리 그의 방식대로 행동에 옮기지 못했다.
어쩌면,
내가 오랫동안 믿어온 ‘정상 가족’이라는 프레임이
나도 모르게,
그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을
조용히, 조금씩 왜곡시켜왔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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