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나에게 알려준 ‘경계’라는 말
사랑하는 사람에게 받은 위로가
가족의 그림자를 조용히 덮어주었다.
억눌림의 시간 끝에서,
진짜 내 편을 만났던 날의 기록.
우리는 서로의 역할이 아니라,
서로를 사랑하기로 했다.
서로의 역할이 아니라,
서로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날 이후, 때때로 엄마는 내 남편이
첫 만남에서 절을 하지 않았다고,
남자답고 싹싹하지 못하다고 말했다.
함께 잠깐 집에 들른 날엔
“어떻게 빈손으로 오냐”며 나를 타박했고,
아빠 생신 전에는 미리 전화가 와
집에 올 때 용돈을 챙겨오라고 당부했다.
나는 어딘가 불쾌한 마음이 들면서도
엄마의 말이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종종,
남편에게 ‘남편다움’을 요구하며
불안한 마음으로 그를 닦달했다.
그러면서도,
내가 결혼에 대한 낯선 감정을 내비칠 때면
엄마는 말했다.
“너무 네 성격대로 굴지 마라.
네 남편이 질려서 떠날지도 몰라.”
아빠는 말했다.
“네 생각을 하면 네 남편이 불쌍하다.”
그런 말들은
‘내 진짜 모습은 성가시니
사람들 앞에 드러내지 말라’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조언이었기에,
나는 관계 안에서 점점 더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남편에게 이 이야기를 용기내어 전했을 때,
그는 조용히 말했다.
“나는 자기가 자기다워도 좋아.
질린다고 생각해본 적 없어.”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당신이 내 진짜 모습을 본 적 없어서 그렇겠지.”
그는 또 말했다.
“나는 자기를 만나고 나서 삶이 달라졌어.
하루하루가 너무 즐겁고, 행복해.”
나는 그 말들을
쉽게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때를 계기로
나는 처음으로
남편의 사랑을 조금씩 믿어보기로 했다.
나 또한 그랬기에.
그리고 지금까지,
그 사랑에 대한 의심,
스스로에 대한 의심을
천천히, 조금씩 덜어가고 있다.
사랑받는 건 이렇게 조용한 거구나,
하고 처음으로 편해졌던 밤.
처음엔, 누군가의 사랑이 조금은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그는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었고,
나는 천천히, 사랑을 받아들이는 법을 익혀갔다.
남편을 만나고서야,
늘 가족의 화합을 위해 조용히 애써오던 나에게
처음으로,
‘나답게 머물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
그곳에서야,
내 존재가 조용히 허락받는 기분이었다.
한동안 우울감에 짓눌려
몸 하나 움직이기 어려웠던 날들.
그런 나를 보여주기 싫어
또다시 죄책감에 스스로를 옭아맬 때마다 —
그는 조용히 찜질팩과 담요를 들고 와
목부터 발끝까지,
말없이 돌돌 나를 감싸주곤 했다.
감정이 요동치는 밤,
울며 쏟아낸 단어들 속에서
나는 죄책감과 눈물을 반복했고
그럴때마다 그는 가만가만,
끝까지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시간이 흐르며,
손을 잡고 걷는 일이 편해졌고
함께 먹는 밥이 참 맛있었다.
같은 음악을 듣는 순간엔
살아 있다는 감각이
가만히 가슴에 내려앉았다.
빠졌던 얼굴의 살,
마르고 쪼그라들었던 내 마음도 —
그의 곁에서
서서히,
다시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족이라는 오래된 감정의 무게는
엄마의 감정 창고가 되어버린 딸의 이야기
엄마는, 아빠가 있든 없든
남편과 내 앞에서 아빠 이야기를 꺼냈다.
그 대화의 대부분은
아빠를 흠잡고 흉보는 말들로 채워졌다.
어느 날은, 점심을 사주겠다며
회사 근처로 나를 불렀다.
나는 기분 좋은 마음으로 나갔지만,
식사 내내 쏟아진 건
여전히 아빠에 대한 원망이었고,
나는 점심시간이 끝날 때까지
자리를 뜨지 못했다.
처음엔,
그냥 나를 보고 싶어서 부른 줄 알았다.
하지만 그날은,
엄마가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을
'사람'이 필요했던 거였다.
서운함이 밀려왔다.
관계 안에서 끊임없이 눌려왔던 엄마를 알기에,
안타까운 마음도 있었지만—
이제는 엄마의 모든걸 품어내기엔
내안에 해결해야 할 아픔이 너무 많았다.
그 반복되는 상황은
결국 내 마음에도
조용한 흉터처럼 남았다.
그리고 그 감정은
말없이 퍼져나가
남편과의 일상 속으로까지 번져갔다.
그대로 흘려보낼 수는 없었다.
조용히, 내 편이 되어준 사람
어느 날, 조심스럽게 그에게 이 이야기를 꺼냈다.
평소엔 늘 조용히 들어주던 남편이—
그날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건… 부모님 두 분이 해결해야 할 일이야.
네가 끼어든다고 바뀌진 않아.”
말을 아낄 줄 아는 사람이기에,
그 한 문장만으로도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는데—
이어진 말은, 내가 미처 상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나도 네 부모님께 잘하고 싶어.
근데 오랫동안 너를 봐왔잖아.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가족에게 받은 상처로 이렇게까지 힘들어하는데…
그걸 알면서도
사과 한 마디 없는 분들은,
솔직히 어른으로서 존중이 잘 안 돼.”
“그동안 빈손으로 인사드리거나
경조사를 챙기지 않았던 건,
내 마음에 거짓말하고 싶지 않아서였어.
내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은—
네가 부모님 뵈러 가자고 할 때,
그냥 옆에 있어주는 거였어.
이 말, 예전부터 하고 싶었는데
혹시 상처가 될까 봐 이제야 말하게 됐네. 미안해.”
“나는…
그게 자기 부모님이라도
자기한테 상처 주는 사람이라면
그냥 싫어.”
‘존중이 안 된다’는 말이
처음엔 조금 낯설게 들렸지만,
이상하게도
가슴 어딘가가 따뜻해지며
조용히 눈물이 흘렀다.
그날 처음으로,
나는 진짜 ‘내 편’이 생겼다고 느꼈다.
그리고 처음으로,
비로소 —
‘가족’이라는 단어가
조금 덜 무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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