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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반성문

by 염홍철


공직을 떠나면서, 공직 생활에 대한 반성문을 쓴 적이 있습니다. 부끄러운 자화상이지만 강의와 글로 공개하기도 했지요. (염홍철 <천천히, 천천히 걷는다> 132~135 참조) 그로부터 10년이 지났습니다. 지금의 제 형편은 어떤지요?


첫째로 위선적인 행동에 대해서 반성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제일 싫어했다는 위선이나, 존 밀턴이 <실낙원>에서 얘기한 ‘보이지 않게 걸어 다니는 유일한 악’ 정도는 아닐지라도, 제 양심에 비추어서는 분명 위선적 언행이 많았음을 고백했습니다. 제 부모님께는 소홀히 하면서도 노인정이나 복지관을 방문하였을 때, 같은 연배의 어르신들께 건강을 걱정하며 친절하고 자상한 위로의 말씀을 자주 드렸습니다. 한편으로 당연하다 생각하면서도 이것이 진정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태도인지, 아니면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또는 인정받기 위해 한 가짜 웃음이 아니었는지 반성을 하였습니다. 부모님께도 똑같이, 아니 그 이상 잘해드려야 했음을 후회했습니다.


다음으로 많은 사람들을 포용한다 하면서도 속으로는 미워했던 것을 반성했습니다. 선거를 치르면서 저에게 독설을 퍼부었던 경쟁자를 미워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저 역시 선거 때는 비슷한 독설을 하였을 것입니다. 또한 행정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에 대해 ‘비판을 사랑하라’는 경구를 인용하면서도 실제로는 서운함을 오래 간직하며 살았습니다. 당연히 받아야 할 비판이나 비난을 섭섭한 마음으로 해당자를 미워한 것이지요.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스스로 합리화하기 위해서 ‘용서’라는 교만함을 나타내기도 했지요. 사실상 용서라는 말이 가당치도 않았지만, 마치 달라이 라마의 수제자라도 된 듯이 용서를 입에 담았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공직자로서 철저한 자기 절제를 못했음을 반성했습니다. 좋은 음식을 먹고, 큰 차를 타고 다니며, 크고 작은 혜택을 누리면서, 그것이 공식적으로 부여된 혜택이라고 합리화하면서 더 낮게 살지 못했습니다. 수많은 사회적 약자를 접하고, 그들에 대해 적절한 대책을 고민하면서도 자신은 그들과 다른 대우를 받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습니다. 부끄러움을 몰랐지요.


이제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굳이 위선적인 행동을 할 필요도 없고, 누구를 미워할 이유나 사연도 없습니다. 일상에서 절제하며 살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위에서 얘기 한 세 가지 반성이 오히려 사치라고 느껴집니다. 자아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니까 익숙한 습관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상황에 만족합니다. 오히려 더 행복합니다. 큰 차보다는 BMW(버스, 지하철, 걷기의 약자)가 더 편하고 부담이 없습니다. 사람은 입장을 바꿔봐야 진정한 ‘자기’를 발견할 수 있는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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