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대설이었습니다. 대설은 이십사절기 중 21번째 절기로, ‘큰 눈이 내리는 시기’라는 뜻이지요. 따라서 대설은 기온이 갑자기 내려가고 산간 지역부터 많은 눈이 쌓이며 물이 얼기 시작하는 시기입니다. 농촌 생활을 했던 경험이 있는 저로서는 대설 때는 추수를 완전히 마무리한 뒤, 겨울을 나기 위한 김장, 곡식, 장작 등 저장을 끝내는 마지막 준비 절기였습니다.
동양에서는 대설을 ‘자연이 완전히 겨울로 넘어가는 경계선’으로 보았습니다. 음(陰)의 기운이 급격히 강해지고, 양(陽)은 땅속으로 완전히 숨어드는 시기라고 생각했고, 인간도 활동을 줄이고 내향적 삶으로 전환해야 하는 때로 인식했습니다. 즉 대설은 단순히 눈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자연의 에너지 방향이 밖에서 안으로 전환되는 시점이었습니다.
올해에는 대설 전에 제법 눈이 많이 와서 예외가 되었지만, 요즈음의 대설의 ‘자연적 징후’는 달라지고 있지요. 전통적으로 대설에는 중부지방 평야에도 첫 폭설이 내리고, 땅이 완전히 얼며, 주간 최고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최근 대설 무렵의 실제 양상은 폭설보다 비가 더 잦아지고, 첫눈이 대설 이후로 밀리는 경우가 많아지며, 낮 기온이 5-10°C까지 오르는 해도 빈번합니다. 눈이 와도 적설량이 적고 녹는 속도가 매우 빠릅니다. 그래서 ‘눈 대신 겨울비가 내리는 대설’이 낯설지 않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절기는 본래 인위적 달력이 아니라 자연의 반복적 리듬을 관찰한 ‘경험적 과학’이었는데, 오늘날 기후 위기 속에서 그 전제가 흔들리고 있는 것입니다. 달력상의 절기는 변하지 않는데 절기가 나타내 주는 자연의 내용은 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기후 위기는 절기와 현실을 분리시키고 있는 것이지요. 절기는 자연의 질서, 인간 삶의 리듬, 농사나 의례까지 연결된 통합적 시간 구조인데, 이러한 자연의 리듬이 흐트러지고 자연과 인간의 불일치가 커지고 있는데, 이것은 요즈음 불안정한 세태(世態)를 반영하는 것이 아닌지 착잡해지네요.
전통적으로 대설은 생명이 죽는 것이 아니라 잠드는 시기라고 하는데, 기후 변화로 인한 오늘날의 대설은 눈이 토양에 스며들지 않고 곧바로 증발하기 때문에, 잠들 줄 모르는 자연이 등장하지 않나 하는 위험한 신호를 받고 있습니다. 눈이 내리지 않는 대설은 단순한 이상기후가 아니라 인간이 자연의 시간 위에 군림해 온 것에 대한 징벌의 상징이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하게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