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로 아침단상이 658회를 맞습니다. 신문에 쓴 칼럼 147회를 더하면 최근 3년 동안 805회의 글을 써서 친지들이나 신문 독자들에게 보내드렸지요. 가능하면 인문학적인 글을 쓰고 있으나, 간혹 정치·경제·사회의 관심사를 쓰기도 합니다. 최근에 극우와 극좌에 대해서 글을 썼고, 진정한 보수나 진보의 가치에 대한 글도 썼습니다. 가능한 한 저의 선호를 배제한 채 중립적인 논지로 구성하도록 노력하였습니다. 읽는 사람 중 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않은 분들은 대체로 공감하나, 보수와 진보에 고착된 분들은 모두 불만이 있습니다. 그렇게 쓰지 않았는데 그렇게 해석을 하고 반론을 제기하니까 저는 할 말을 잃고 맙니다. 그래서 ‘사고 형성의 경로가 굳어졌을 때 사람은 왜 설득되지 않는가?’라는 거창한 문제의식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인식론적 또는 심리학적인 주제가 될 것 같기도 합니다.
우리는 흔히 갈등의 원인을 무지에서 찾습니다. 알면 달라질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른말을 하고 옳은 글을 통하여 잘못된 인식을 바꿔 보려고 노력하지요. 그러나 현실은 다릅니다. 아무리 정확한 설명을 해도, 아무리 논리적으로 설득해도 생각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습니다.
지식은 옳은 것을 가리킵니다. 검증과 성찰을 거쳐 축적된 결과물입니다. 그러나 정보는 다르지요. 정보는 빠르고 자극적이며 걸러지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정보들이 기존의 인식과 결합할 때 하나의 사고로 굳어집니다. 그렇게 형성된 사고는 ‘사실’이 문제가 아니라 ‘정체성’의 문제가 됩니다. 틀렸다는 지적은 곧 나에 대한 부정으로 들리기 때문에 이 순간부터 대화는 멈추게 됩니다.
그렇다면 방법은 없을까요? 이러한 현상의 원인은 파악할 수 있는데 관련 책을 찾아봐도, ChatGPT에 물어봐도 해소 방법에 대한 신통한 답은 없습니다. 결국 생각을 바꾸는 일은 어렵지만 생각이 멈추지 않게 하는 일은 가능하다는 데서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정답을 제시하기보다 질문을 던지는 것이지요. ‘그건 틀렸다’는 말보다 ‘그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있었는가?’라는 질문이 사고를 밖으로 꺼낼 수 있지 않을까요. 판단이 아니라 성찰이 시작되는 지점이지요.
변화는 확신이 깨질 때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갈등을 해소하려면 먼저 대화가 가능한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모든 생각이 합의될 수는 없으나 함께 행동할 최소한의 지점을 찾을 수는 있다는 희망적인 생각을 해봅니다. 민주사회가 작동하는 방식도 이렇지 않을까요? 생각의 일치를 강요하는 사회는 갈라지고, 차이를 관리하는 사회는 버텨냅니다. 우리가 갈등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갈등이 아니라 ‘사고가 굳어버린 시대’에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더 많은 말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질문이 필요한 오늘 월요일 아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