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몸에 있다.

by 염홍철



‘행복은 몸에 있다.’라는 말은 단순한 격언이 아니라 인간을 의식·정신 중심으로만 이해해 온 전통에 대한 중요한 반전을 담고 있습니다. 저는 걷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행복은 몸에 있다는 말을 쉽게 실감하고 있습니다. 걷기는 단순히 건강을 위한 것이 아니라 큰 기쁨과 의미를 느낄 수 있는 행위입니다. 가을 속을 걸을 때는 도시의 모습들이 가슴을 뭉클하게 하고, 겨울에 찬 바람을 마주하며 걸을 때는 몸 안의 체온을 느끼며 뭔가를 이룬다는 흡족함이 있습니다. 낙엽을 밟거나 딱딱한 보도 위를 걸어도 그 길 위에서 마주한 이야기들은 먼 훗날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것입니다.


‘행복은 몸에 있다.’라는 말은 서울대학교 최인철 교수의 글에서 처음 읽었지만, 많은 철학자나 심리학자들이 표현만 다를 뿐이지 행복이 몸에 있다는 주장을 해왔습니다. 일찍이 고대 그리스철학자 에우다이모니아는 행복은 감정 상태가 아니라 삶 전체의 형식이라고 하였습니다. 행복은 사는 방식에 있다는 뜻이지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행복은 몸을 포함한 인간의 활동 전체가 잘 기능하는 상태를 뜻했습니다. 근대 철학자 스피노자는 인간을 정신과 몸의 결합체가 아니라 하나의 실체의 두 표현으로 보았습니다. 기쁨이나 슬픔 또는 행복은 몸이 ‘확장’ 될 때 발생한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은 몸에 있다는 말은 행복이 의식 속 판단 이전에 이미 몸의 감각으로 먼저 결정된다는 뜻입니다.


오늘의 심리학과 신경 과학 또한 행복이 의지의 사물이 아니라 수면, 움직임, 햇빛, 식사, 관계 같은 일상의 조건에 깊이 의존한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몸은 개인의 신체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우리가 놓인 환경, 시간의 리듬,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거리까지 포함한 ‘삶의 총체’입니다. 과로와 불안, 고립의 구조 속에서 마음만 긍정하라는 주문은 공허합니다. 반대로 제때 걷고, 제때 쉬고, 제때 관계를 맺는 삶에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안정감이 먼저 찾아옵니다. 행복은 목표를 추구할 때보다 삶이 맞물릴 때 비로소 따라오는 결과입니다.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잘 살고 있을 때 행복해집니다. 이러한 논리에 현상학도 한몫을 합니다. 현상학은 인간을 ‘세계를 바라보는 의식’이 아니라 ‘세계를 살아내는 몸’으로 이해하고 있지요.


제가 서두에 걷는 데서 행복을 느낀다고 했는데, 몸으로 하는 일이 비단 걷기뿐이겠습니까? 위의 학자들이 주장했듯이, 맛있는 음식을 먹는 일, 스킨십에서 얻어지는 좋은 인간관계, 흔들의자에 앉아 수평선을 바라보는 시선은 행복의 극치가 아닐까요? 따라서 행복은 생각의 성취가 아니라 삶이 몸에 무리 없이 스며드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여기서도 ‘몸’과 ‘마음’이라는 양면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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