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에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에 회의와 의구심을 갖게 됩니다. 잘못된 것에 책임을 져야 할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이 시간이 조금 지나면 다시 요직으로 돌아오고, 더 큰 조직과 더 많은 자원을 손에 쥡니다. 반면에, 그 위기의 과정에서 문제를 제기했던 사람이나 내부에서 양심을 말했던 사람은 조직 밖으로 밀려나거나, 조용히 사라지게 됩니다. 이때 우리들은 왜 선한 사람은 고통받고, 왜 문제를 일으킨 사람은 오히려 성공하는가?라고 묻게 됩니다.
이 질문과 관련하여 가장 고전적인 답을 제시한 사람은 5세기 사상가였던 보에티우스입니다. 그의 주장은 지금도 설득력이 있게 됩니다. 권력의 중심에 있다가 정치적 음모 속에서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고 감옥에서 사형을 기다리며 <철학의 위안>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는 억울함을 토로하기보다 우리가 성공이라고 부르는 것의 기준부터 다시 물었습니다. 그 질문은 오늘날 정치·경제 엘리트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지요.
보에티우스에 따르면 권력과 부, 지위는 그 자체로 봐서는 선도 악도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이 어떤 인간을 만들어 내는가입니다. 악한 사람이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그는 더 많은 것을 숭배하고, 더 많은 사람을 통제해야 하며, 더 많은 책임을 회피해야 합니다. 겉으로는 성공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점점 자유를 잃고 맙니다. 보에티우스는 이런 상태를 성공이라 부르지 않았으며, 이미 처벌받으면서 사는 삶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정치와 경제의 엘리트는 일반 시민보다 더 많은 기회를 가집니다. 동시에 더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 책임을 지지 않는 사회에서는 엘리트의 도덕은 사치처럼 취급됩니다. 성과만 있으면, 과정은 무시되고, 숫자만 맞으면 판단은 유예됩니다. 이때 엘리트는 성공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회는 점점 신뢰를 잃게 되지요. 보에티우스의 말대로라면, 이는 개인의 승리가 아니라 공동체의 패배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그 질문을 바꿔야 합니다. 왜 엘리트는 성공하는가가 아니라 우리는 어떤 성공을 엘리트에게 허락하고 있는가입니다. 책임 없는 성공을 반복해서 용인하는 사회에서 엘리트는 점점 오만해지고 시민은 점점 냉소적으로 됩니다. 보에티우스가 말한 위안은 이런 냉소를 달래기 위한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준을 바로 세우라는 요청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누가 얼마나 높이 올라갔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책임을 짊어졌는지가 성공의 기준이 되는 사회, 선한 사람이 고통받지 않는 사회는 금방 오지 않겠지만, 적어도 악인이 성공으로 포장되지 않는 사회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엘리트보다 그들을 바라보는 시민의 판단에서 비롯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