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관의 기쁨

1월과 2월에 쓴 글들 모음 ('나의 독서법' 외 3편)

by 박유미

<나의 독서법>


새해 다짐이 오래 가리라고 기대한 적은 없었으나 1월 동안 꽤 잘 유지되고 있는 습관들이 몇 가지 있다. 계단 걷기, 간단한 일기 작성, 그리고 독서다. 올해 들어 9권이나 읽었다고 하면 처음에는 다들 입을 벌리고 뒤 이은 설명을 듣고 나서 김이 픽 빠진다. 맨 처음 스무 장 정도 집중해서 읽고 나머지는 한쪽에 한 줄씩만 읽어도 어쨌든 다 읽은 거야.

끝까지 정독하고 메모로 정리해야만 의미 있는 독서라고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그 반대쪽에 나 같은 독서가 한 명이 있는 게 뭐 문제겠는가. (심지어 그 둘은 부부이다.) 내 경험 상 안 맞는 책과 씨름하느라 지쳐 독서 자체에서 나가떨어지는 것보다는 산뜻하게 다른 길을 찾아 돌파하는 게 나았다.

다만 요즘 책을 고를 때 내게 잘 맞는 분야 대신 낯설고 피해왔던 분야의 책들을 위주로 하고 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루할까 봐 혹은 겁이 나서 등등) 못 본 척 해온 책들을 하나씩 펼쳐보기 시작했다. 에릭 칼과 백희나의 그림책들, 그리고 연휴를 포함한 며칠간 나를 길 위에서 떠돌게 했던 <노마드랜드>도 그중 일부이다. 조금씩 내 마음의 자리를 넓혀가다 보면 끝까지 읽어내는 책들도 더 많아지리라 기대해 본다.(1.24.)



<계단을 걷는 시간>


내게도 잘하는 운동이 하나쯤은 있다. (설마 그런 게 있을 줄 몰랐으나 존재했다.) 제주 올레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 때만 해도 막연히 마음속에 품은 생각이었으나, 이제는 당당히 말하곤 한다. 나는 걷기를 잘한다!

걷기 종목 중에서도 계단 걷기는 과연 "내향인의 스포츠"라 칭할 만하다. 함께 하는 동료도, 스쳐가는 풍경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다. 1층부터 15층까지 이어지는 좁은 통로를 묵묵히 반복하는 경험은 외부의 자극을 차단하고 내 안으로 깊이 들어가기에 최적의 환경이다. 이어폰을 꽂고 목소리에 집중하면 그 안의 숨소리와 삐죽대는 감정에 쉽게 동기화된다.

지난 저녁은 나의 외로운 스포츠에 가족들이 함께 해주었다. 손전등을 들고 신이 났는지 중혁이는 씩씩하게 한 바퀴 반을 걸었다. 남편은 중혁이를 목마 태워서 두 바퀴 더 걷고, 나는 중혁을 업은 채 마저 한 바퀴 더 돌았다. 지루한 계단의 반복 속에서도 그저 함께 있으면 즐겁다는 이들이 거기에 있었다.(1.26.)



<커피와 책>


독서의 이득 중 '책을 읽는 시간' 그 자체가 아주 큰 선물임을 체감하고 있다. 어느 고요한 밤에는 <생에 감사해>를 읽으며 김혜자라는 예술가와 3시간 동안 독대하는 기쁨을 누렸다. 요즘 출퇴근 시간에 누린 풍요는 헨미 요가 쓴 <먹는 인간> 덕분이다.

그렇지만 최근 나에게 감동을 주는 쪽은 책보다는 커피이다. '프랭크커핀바'의 다양한 에스프레소 메뉴, '가치있는 커피'에서 받아 온 룽고 아메리카노, '싱크오어스윔'의 다쿠아즈를 곁들인 아메리카노. 이 공간에서 이걸 또 마실 수 있다면 더 살아가고 싶다, 고 이번 주에 세 번이나 생각했으니 감동이 철철 넘치는 한 주였던 셈이다.

직업도 겉모습도 심상한 듯 비치는 나지만, 자주 좌절을 느끼고 또한 그보다도 많이 기쁨을 발견하며 살고 있다. 오랜만에 연락한 친구가 "너는 항상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인다"기에 "우울과 극복의 반복"으로 살아왔다고 답장을 보냈다. 출렁대는 파동도 멀리서 보면 고요해 보이지. 순간이 담긴 사진들 속에서 우리의 얼굴이 매번 웃고 있던 걸 보면, 그냥 버티기만 했다고 부르기에는 아쉬울 만큼 반짝이는 시간이 많았다. 오늘은 책과 커피에 그 공을 돌리며 이 글을 바친다.(2.5.)



<일기 쓰기>


독서, 계단 걷기에 에어 세 번째로 길들이고 있는 습관은 일기 쓰기이다. 아기자기한 다이어리 꾸미기도, 노트를 가방 한편에 품고 다니는 메모 습관도 없는 내가 갑자기 일기장을 꺼내든 데는 사소한 이유가 있다. 매일 점심시간을 누구와 무얼 먹으며 보냈는지 기억하기가 어려운 게 너무 아쉬워서였다.

고상한 사색과 탐구 대신 그날 겪은 일들을 행적조사처럼 기록한다. 어딜 가고, 무얼 먹고, 누굴 만나, 어떤 것을 보았다고. 하루에 단 한 줄만 쓴다면, 초심과 같이 그날의 점심에 대하여 적었다.

일기를 쓸 때 남편이 옆에 앉아있으면 그의 목소리를 옮겨놓기도 하고, 중혁이가 있으면 갖고 놀던 스티커를 붙이도록 내버려 두기도 했다. 웃긴 일이 있으면 끄트머리에 조그맣게 그려보기도 하고, 미처 더하지 못한 일이 떠오르면 후다닥 끄적이고 잠자리에 들었다.

지나간 날들을 다시 읽은 적은 거의 없지만 기록의 가치는 충분했다. 쓰다 보면 이것도 좋았고, 저것도 좋은 일이며, 그래서 참 좋은 날이었다고 하루를 기억하게 되기 때문이다. 아주 사소한 순간들이 글자의 옷을 입는 순간 특별하고 감사한 선물들로 돌아왔다.

오늘 밤에는 아기를 재우고 짐 자무시 감독의 <패터슨>을 보았다. 주인공이 버스를 운전하는 틈틈이 시를 적는 노트가 나의 일기장과 닮았다. 영화가 끝나고 일기 마지막에 한 줄을 더했다. 이 영화와 함께 하는 시간이 있었음에 고마워하는 마음을 순식간에 박제해두는 나의 하차 태그. "<패터슨>을 보았다!"(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