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의 비결
너와 오래오래 살고 싶어서 궁리했지
"영감님, 엄마가 시방 몇시냐구."
"넉 점 반(네 시 반)이다."
"넉 점 반, 넉 점 반..."
나의 낭독에 맞춰 중혁이의 작은 손은 신중하게 책장을 넘긴다. '넉점반' 책방에서 사 온 같은 이름의 그림책이 퍽 마음에 들었나 보다. 영감님 가겟방에 있는 드라이버는 무얼 고치는 중인지, 동네 사람들이 입고 있는 옷은 왜 요즘과 다른지, 어째서 개미들은 줄지어 다니는지 물어보며 요모조모 그림을 뜯어 맛본다. <알사탕>의 명대사들(동동아, 아빠 왔다. 숙제했냐?)을 줄줄이 외는 중혁이 곧 이 책의 아름다운 구절들도 섭렵할 테지.
<넉 점 반> 속 아기의 여정은 영감님께 시간을 여쭌 넉 점 반부터 시작한다. 집에 가는 길에 물 먹는 닭을 구경하고, 접시꽃 핀 담장 앞에서 기어가는 개미 떼를 구경하고, 어디론가 날아가는 고추잠자리를 한참이나 구경했다. 그리하여 서산에 해가 뉘엿거릴 때가 돼서야 돌아온 아기는 엄마에게 반갑게 고한다. 지금은 넉 점 반이라고. 어른들이 시계를 읽는 방법으로만 '시간'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때, 아기는 자기만의 생생한 감각으로 자연과 교감하며 '시간'을 만들어낸다. 이 놀라운 시간 감각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누군가 남편에게 장래희망을 물으면 그는 항상 '불로장생'이라 답했다. 주저함이 없던 그의 꿈에는 최근 자신 없는 어조가 묻어나기 시작했는데, 기술발달의 속도가 예상보다 너무 더디다는 게 이유였다. 자기가 중혁이의 아들이어서 진보된 기술의 수혜를 입을 수 있었으면 좋겠단다. 로봇처럼 인체개조도 하고 싶다는 양반이니 그 아쉬움은 분명 진심이다. 가까이 지내는 동안에도 아주 오래 살고 싶다는 그의 마음에 온전히 공감은 못해왔다. 그래도 그가 '더 살아가기를 바라는 사람'이라는 게 나는 참 좋았다.
내가 찾은 장수의 비결을 들려주면 그가 기뻐할까. 우선 내 품 안의 시계부터 꺼내 보여주어야지. 어릴 적 1년에 걸친 긴 세계여행을 다녀온 후 내 안에 다져진 고유한 시간감각이 있다. 첫째, 우리가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소유의 대상은 시간뿐이다. 둘째, 과거-현재-미래의 나는 멀찍이 떨어진 도미노처럼 서로 독립된 존재이다. 도미노가 기울어지면서 다음 조각을 넘어뜨리듯, 듬성한 '나(혹은 나들)'라는 존재는 서로 다른 시간대에서 영향을 주고받는다. 셋째, 시간의 처음과 끝을 이으면 유한하지만 그 사이의 공간은 무한하다. 마치 녹화된 동영상의 길이는 정해져 있지만 편집 화면에서 특정 부분을 선택해 좌우로 벌리면 느린 화면으로 쭉 늘어나는 것처럼.
나에게 오래 산다는 건 하루에 더 많은 삶을 끌어다 놓는 일이다. 아이와 얼굴을 맞대고 웃으며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고, 맛없는 내 음식을 기꺼이 칭찬해주는 남편에게 감사하고, 익숙한 길을 산책하며 부드러워진 햇살에 감탄하는 경험으로 하루를 채워가는 일. 물 먹는 닭과 개미떼와 잠자리를 구경하던 <넉 점 반>의 소녀가 아주 오랜 삶을 보낸 그 오후처럼. 여기까지 이야기를 들은 그가 "그래서 실질적으로 수명을 늘릴 수 있는 방법은?"이라고 묻는다면, 나는 아직 서문까지밖에 못 읽은 <이기적 유전자>를 다시 펼쳐 들고 거실로 도망갈 것이다. 그 순간조차도 아주 소중하게 주워 담고서.(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