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저녁

남편과 이야기 나눈 시간을 기념하며

by 박유미

오후 7시 50분. 불이 꺼진 안방에 윰과 중혁, 민이 차례대로 누워있다. 방금 전까지 앞구르기를 하던 중혁은 기세가 한풀 꺾여 행동반경이 좁아졌다. 가만히 모로 누워 윰의 손을 조물거린다. 대화하는 윰과 민의 낮고 차분한 음성.


윰: (아기의 손을 쓰다듬으며) 전자책의 시대에도 종이책이 살아남아있는 건 바로 스킨십 때문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묵직한 책을 움켜쥐는 느낌, 책을 펼칠 때 나는 냄새, 한 장씩 넘기는 경험 그 자체... 인공지능이 많은 것을 대체하는 동안에도 끝까지 살아남는 건 그런 스킨십의 경험을 제공하는 서비스일 것 같아요. 변호사 같은 전문가는 AI로 대체되어도 요양보호사는 대체되지 않는 것처럼... 음.


민: 챗지피티는 질문을 잘하기만 하면 답을 다 만들어 내주잖아요. 더 이상 기존의 방식으로 공부를 할 필요가 없어요.


윰: 나는 챗지피티가 만들어내는 결과물을 평가하고 내 것으로 취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인공지능이 만들어낸 답이 나 혹은 우리 공동체가 필요로 하는 정보가 맞는지 판단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


오후 8시 10분.


민: 인공지능으로 인해서 결국 인간은 다 멸종하고 호모로보티쿠스가 지배할 거라고 생각해요.


중혁: 엄마랑 아빠랑 왜 계속 이야기해요?


윰: 엄마아빠 이야기는 다 했어. 기다려줘서 고마워. 중혁이도 의견을 이야기해 줄래?


중혁: 예초기가 드르륵 하면서 소리가 나요. 그리고 펑! 터졌어요... (눈꺼풀이 살금살금 기울더니 잠에 든다)


윰: 하하, 자는 모습 좀 보세요. 귀여워라.


오후 8시 30분. 잠에 깊이 빠진 중혁을 팔베개에서 내려놓은 윰이 민에게 다가가 아기를 껴안듯 얼굴을 맞댄다.


민: 중혁이가 글자를 읽게 되면 나란히 각자의 책을 읽을 수 있어서 유용한 시간이 좀 더 많아지겠지요. 중혁이가 커서도 우리가 친구처럼 지냈으면 좋겠어요.


윰: 나는 친구로 여겨주기를 바라지는 않아요. 다만 중혁이가 힘들 때 기댈 수 있는 안정적인 피난처로 언제나 마음속에 있으면 좋겠어요.


민: 당연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으니까. 우리는 꼭 그렇게 해요.


오후 8시 55분. 여전히 같은 자세로 서로에게 기대어 있다.


윰: 중혁이는 동생이 생긴다면 장난감으로 놀아주겠대요. 자기는 형님이니까. 나는 스무 살이 넘도록 우리 언니가 아기처럼 대했어요. 자는 데 볼에 뽀뽀를 해준 적도 있다니까.


민: 나랑 여동생은...


오후 9시 20분. 윰과 민은 이불을 동그랗게 말아 끌어안고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아있다. 중혁은 작게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져 있다.


윰: 예전에는 높은 목표와 그걸 향해 달려나가는 여정을 좋은 삶이라고 생각했는데, 최근에 생각이 많이 바뀌었어요. 누가 지금 나의 대단한 점을 꼽아준다면, 나 스스로 자부심이 뭐냐고 묻는다면, 나의 생활이라고 말할 거예요.


민: 시간이 가져다준 변화군요. 다음에는 또 어떻게 바뀌게 될까요.


오후 9시 50분. 윰과 민이 거실로 나왔다. 민은 인화한 사진들을 정리하기 위해 앨범을 꺼내 펼치고 적절한 배치를 고민해본다. 그 곁에 엎드린 윰은 일기를 쓴다.


윰: 이번에 자기가 고른 <이기적 유전자>를 나도 읽어보기로 했잖아요. 전화영어 신청 공문을 우연히 보고 갑자기 영어공부를 시작하게 된 것도 그렇고. 두려워하며 피하던 것들이 내게 던져졌을 때 오히려 껴안아보는 경험을 요즘 하고 있어요. 내가 선택하지 않았지만 내게 던져지는 것들을 적극적으로 사랑한다, 그게 아모르파티지.


민: 좋은 도전이에요. 나는 아주 응원해요.


오후 10시 15분. 온 방의 불이 꺼진다.


윰: 우리 오늘 엄청 많이 대담을 나누었네요.


민: 둘이서 독서모임 했어요. 잘 자요.


오후 10시 20분. 사방이 고요하다. 셋의 숨소리가 밤을 채운다.(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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