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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이후를 생각한다

타이어만 교체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by 염철현

영어에서 은퇴 혹은 정년을 뜻하는 단어는 'retirement'다. 단어를 풀면 '다시'를 뜻하는 re와 외래어 '타이어'를 뜻하는 tire의 합성어다. 정년이란 자동차의 낡은 타이어를 새로 교체하는 것처럼 인생을 새로 시작하는 데 필요한 타이어를 새로 바꿔 끼우는 것과 다름없다는 우스갯소리다. 내친김에 영어 단어의 조어에 취미가 있는 필자는 ire(분노, 노여움)가 붙는 단어를 찾아보았다. dire(대단히 심각한), fire(해고하다), hire(고용하다), mire(수렁), retire(은퇴하다), tire(싫증 나다. 피로해지다) 등 한결같이 경제활동 과정에서의 희로애락과 관련된 단어였다. 원하던 직장에서 채용 합격 통지를 받았을 때 얼마나 기쁘고 행복한가. 세상을 통째로 얻은 것 같다. 해고통지를 받게 되면 인생이 막막하고 마치 수렁에 빠진 것 같은 대단히 심각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직무에 싫증이 나거나 은퇴를 하게 되면 이래저래 걱정거리가 생기기 마련이다.


필자의 정년은 만 65세이지만, 두 해를 앞당겨 조기은퇴를 하기로 했다. 퇴직을 결심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우선은 건강에 자신이 없다. 오래 기간 혼자 자취생활을 하다 보니 냉장고문을 여는 것조차 싫어졌다. 냉장고에서 나오는 차가운 공기가 혐오스럽기까지 하고 차가운 음식을 레인지에 데워먹는 것도 질렸다. 끼니를 부실하게 챙기다 보니 몸의 균형이 무너져 건강에 적신호가 오기 시작했고 특히 추위에 약한 체질인 필자에게 서울의 추운 겨울은 감옥살이보다 못했다. 주말에 내려간 시골에서 서울에 올라올 때마다 이런저런 반찬을 챙겨 오지만, 짐보따리를 풀어 냉장고에 넣고 나면 챙겨 먹을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 한겨울에 밤새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까 싶어 겁부터 나기 시작했다(밤사이 마비가 온 지인이 평생을 식물인간으로 살고 계신다). 60세 언저리부터는 잔병이 생겨도 쉽게 낫지가 않았다. 회복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고 신체 각 부위에서 이상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필자는 선친으로부터 건강한 신체를 물려받았다고 생각하여 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도 세월 앞에서는 장사가 없는 법이다. 강철도 오래 버티면 피로가 쌓여 부러지는 법인 데 사람이야 오죽하겠는가 싶다. 그동안 관리부실이 쌓여 여러 가지 전조(前兆)를 알려주었다. 하인리히 법칙이 맞다고 본다. 지금이라도 전조를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그에 맞는 행동을 취하기로 한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더 이상 현재보다 더 잘 가르칠 자신도 없고, 가르칠 내용도 막막하였다. 한마디로 지식배터리의 수명이 다됐다는 것이다. 시대는 급변하고 변화에 대비하기 위해서 또는 적응하기 위해 공부하는 제자들의 갈구하는 눈빛을 애써 피할 수 도 없는 노릇이다. 필자는 교육학을 주전공으로 했지만, 대학에서는 주전공을 가르치기보다는 인접학문을 독학으로 공부하여 가르쳤다. 다문화학, 노인학, 인문학 등의 영역을 넘나들며 변화를 꾀했다. 근본적인 이유는 교육학이 시대변화에 부응하지 못하고 학생 수요가 많지 않기 때문이지만, 솔직히 주전공을 곁에 놔두고 인접 학문을 가르쳐야 한다는 자괴감도 숨길 수 없었다. 소속 학과에서도 시대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하기 위해 교육과정을 다양화하고 수요자중심의 자격증 관련 프로그램을 개설하였지만 한계가 있었다. 더 스타일 구기게 전에 강단에서 내려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떤 사람은 정년을 연장해도 시원찮을 판에 왜 조기은퇴를 하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또 그 말은 필자를 위해서 하는 말인 줄 알고 있지만, 필자 자신의 내적 외적 형편을 잘 모르는 사람이다. 이제는 내면의 진실된 목소리를 경청하고 따라야 할 때가 되었다.


은퇴 이후 즉 노년기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에 대한 정형화된 이야기나 노하우에 대한 지식과 정보는 널리 알려졌다. 그 지식과 정보에는 은퇴자에게 보편적이고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삶이 있고, 개인의 차별화된 철학도 있다. 무엇보다 필자는 학부에서 노인학을 가르치면서 노인(노년)에 대한 이론적 맥락은 물론이고 바람직한 노년 생활의 지향점에 대해 많은 문헌과 자료를 공부했으니 새삼 이론을 되풀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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