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란 작가의 소설을 좋아한다.
그녀의 작품을 처음 접한 건 단편집 ‘바깥은 여름’이다. 그 중에서도 ‘침묵의 미래'라는 작품을 가장 좋아하는데, 간단히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모국어의 멸종에 관한 이야기이다. 작가가 펼쳐 놓은 섬세하고 슬픈 문장들을 눈으로 좇다 보면 고독에 대한 세밀하고 우아한 상상화를 감상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대략의 줄거리는 이렇다. 세상에 자기들만의 언어를 사용하는 수많은 소수민족 중 각 부족에서 단 한 명만 남은 사람들을 모아 놓고 '소수언어 전시관'을 만들어 그들을 '전시'한다는 독특한 설정이다. 전시관에 언어샘플로 존재하는 그들은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를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다는 사실에 몸부림치고, 저항하고, 절망하다 마침내 침묵 속에 잠긴다. '안녕하세요'와 같은 간단한 인삿말도 나눌 존재가 없는 상황에 처한 극단적 외로움. 천여 명의 언어샘플들과 함께 살지만 그 누구도 서로 소통할 수 없는 고독. 작품의 화자가 '말' 그 자체라서, 그 말을 사용하는 유일한 존재인 전시관 속 어느 노인의 죽음으로 인해 자신(말)도 죽음을 맞이하는 이야기. 어디서도 읽은 적 없고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이야기에 빠져 허우적대던 와중에, 이 작품이 2013년 이상문학상 대상을 받은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역시 나의 안목이란~ 하며 잠시 우쭐대다가도, 작가가 펼쳐놓은 깊고도 끈적한 고독에 속절없이 다시 빨려 들어가곤 했던 2017년 가을이 생각난다. 나의 첫째 아들이 태어난 계절이었다.
임신 기간은 평온했다. 야근을 시키지 않는 회사에 다니고 있었고, 입덧은 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평소에 갖고 있던 편두통이나 아토피 등의 지병이 사라지는 '임신매직'을 체험할 정도로 몸도 건강했다. 머리숱이 풍성해졌고 피부가 보드라워졌다. 남편이 내게 '너는 임신 체질인가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막달이 다가올수록 분만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지만, 괜한 공포에 사로잡힐까봐 각종 겁주는 말들로 가득한 분만 후기 같은 것도 부러 찾아보지 않았다. 출산 즈음 아기의 무게가 4키로를 넘겼던 탓에 자연분만이 아닌 제왕절개를 일찌감치 결정했다. 그래서 끔찍한 진통을 체험하지 않고 수술실에서 의사와 간호사들이 두런두런 수다 떠는 소리를 들으며 편안히 출산했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바로 그 순간이 변곡점이었다는 것을. 임신기간 동안 상승곡선을 그리던 심신이 출산 직후 급격히 아래로 곤두박질 치기 시작했다.
몸이 힘들었던 건 너무나 할 말이 많기도 하고, 따로 할 말이 없기도 하다. 대부분의 산모에게 공평하게 닥쳐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도무지 잠을 잘 수 없는 새벽 수유와, 이렇게 심하게 빠져도 생을 계속 이어갈 수 있나 싶을 정도의 산후탈모와, 각종 근육과 관절 통증까지, 그냥 모든 산모들이 겪는 기본은 다 겪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마음의 고통이었다. 그것만큼은 '남들도 다 그렇다'라며 나 자신을 등 떠밀어 버릴 수 없었다. 남들도 이만큼 겪는지 안 겪는지 모르지만 마음의 아픔은 나만의 고유하고 오롯한 고통처럼 느껴졌다. 잔잔한 바다에 유유히 떠 있다 예상치 못한 파도에 휩쓸리듯 산후우울증을 만났다.
산후우울증. 이렇게 다섯 글자로 간단히 표현해도 되나 싶은 이 질병은, 직접 겪어본 나로선 제대로 설명하기가 무척 힘들다. 출산을 기점으로 요동치는 호르몬 때문이라고 하기도 하고,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과도한 육아노동에 대한 부작용이라고도 한다. 원인이야 어찌되었든 앓게 되는 사람마다 다채로운 감정과 증상을 수반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극단적으로 심하게 앓거나 주변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되면 뉴스에 나오는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지기도 한다. 나는 다행히 뉴스에 피해자 혹은 피의자로 호명되는 일 없이 무사히 이 질병을 넘기긴 했지만, 당시의 고통은 아직도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내 마음을 찌르고 후벼 파던 수많은 감정 중에 가장 치명적이었던 것은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외로움, 아주 생경하면서도 동시에 너무나 생생한 '혼자'라는 감각이었다. 남편이 회사에 출근하고 육아휴직 중인 내가 아기와 단둘이 집에 있는 시간이 많은 나날들이었다. 그때 처음 알았다. 혼자라는 감각은 정말로 혼자 있을 때보단 누군가와 함께 있는데 소통할 수 없을 때 더욱 선명해진다는 것을. 아기는 매일 매 순간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존재였으나 애석하게도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였다. 그러나 나는 아기의 성장을 담당하는 제1의 책임자였기에, 통하지 않더라도 끊임없이 말을 걸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새로운 언어 자극을 꾸준히 공급해서 언젠가는 말이 통하는 존재로 성장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그 행위는 꽤나 고통스러웠다. 끊임없이 말을 내주었지만 한 마디도 돌려받을 순 없었으니까. 육아 노동이 고통스러운 핵심적인 이유는 바로 그러한 노력들이 한두 번으로 끝나지 않고 언제 그만둘 수 있을지 쉽게 가늠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는 홀로 말하거나 속으로 말을 삼키는 시간들에 점점 지쳐갔다. 급기야 아침에 눈을 뜨면, 아침이 또 왔다는 사실에 절망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지경이 되었다. 마음 속 폐허의 면적이 점점 늘어 가는데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할지 조금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물론 대화 상대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육아노동 동료인 남편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가 퇴근하면 참았던 말을 쏟아내는 것도 해결책이 되진 못했다. 나의 하루하루가 외롭고 고통스러웠던 만큼 남편의 회사생활도 수월하진 않은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그때의 우리는 서로 말을 주고받는 대화보단 얼굴만 마주본 채 각자의 고통에 대해 독백을 쏟아내는 데 집중했다. 어른이 된 이후 가장 많은 수의 가족과 함께 살게 되었음에도, 한편으론 그 어느 때보다 지독히 혼자 살아 내는 시간이었다.
고통에 직면하면 어떻게든 닥치는 대로 성급하게 벗어나보려는 나의 습성은 육아노동에 아낌없이 돈을 지불하는 방식으로 발현되었다. 맞벌이 상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모님'을 고용했다. 일주일에 세 번, 하루 다섯 시간 정도 아이와 가사를 맡길 수 있었다. 내가 가진 모성은 그리 숭고하지 못하여 나만의 괴로움을 해결하는 일에 자주 우선 순위를 내주곤 했다. 누군가는 찜찜해서 남의 손에 못 맡긴다는 신생아를, 나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이모님 손에 턱턱 안겨주고 집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러면 그 지독한 외로움도 금세 해결될 줄 알았다. 그렇게 외출을 하게 되면 반드시 누군가를 만나서 밥을 먹거나 수다를 떨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마음의 병이라는 건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답답한 집안을 벗어나 쏟아지는 햇살과 선선한 가을 바람을 마주하고도, 나는 누구에게도 연락할 수 없었다. 누군가와 말을 '주고받고'싶은 마음이 간절하다가도 막상 핸드폰을 열면 연락하고 싶은 상대가 없었다. 아니, 상대가 없었다기 보단 의지가 없었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다가도 별안간 무엇이든 귀찮아져 버리고 마는 허무의 상태가 하품처럼 자주, 그리고 걷잡을 수 없이 반복되었다. 돈을 써서 아이를 맡기고 집 밖으로 나와 한다는 일이 고작 고개를 낙엽처럼 떨구고 거리를 하염없이 배회하거나, 카페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쳐다보는 것이었다. 아기는 떼 놓고 나왔는데 외로움은 떼 놓고 나올 수 없었다.
'침묵의 미래'를 읽은 게 바로 그 시기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소통의 가능성을 안은 채 부푼 마음으로 집밖에 나왔다가, 급작스럽게 닥쳐온 허무에 발이 걸려 넘어진 오후였다. 하릴없이 카페에 앉아 책을 펼쳤는데 그게 소설의 첫 페이지였다. 나열된 단어들을 무심하게 눈으로 따라가다, 작가가 풀어놓는 이야기에 점점 감정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타이밍이었다. 누구와도 소통할 수 없는 극단적인 '혼자됨'에 대한 이야기였고, 하필 나는 그 마음에 잠식당한 시기였으니까. 눈앞에 펼쳐진 소설과 내 마음의 주파수가 맞아 들어간 순간이었다. 마음 놓고 울 수 있는 상대를 만난 것 같은 구슬픈 반가움을 느끼며 읽어 나가다, 소설의 후반부 어느 지점에서 마침내 나는 눈물을 떨구었다. 자신이 속했던 집단 중 홀로 살아남아 '소수민족 언어 샘플'로 전시된 노인의 길고도 고통스러운 침묵에 관한 문장들이었다.
"그에게 모어母語란 호흡이고, 생각이고, 문신이라 갑자기 그걸 '안 하고 싶어졌다'해서 쉽게 지우거나 그만둘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는 말과 헤어지는 데 실패했다. 그렇다고 말과 잘 사귄 것도 아니었다. 말을 안 해도 외롭고, 말을 하면 더 외로운 날들이 이어졌다. 그는 자기 삶의 대부분을 온통 말을 그리워하는 데 썼다. 혼자 하는 말이 아닌 둘이 하는 말, 셋이 하면 더 좋고, 다섯이 나누면 훨씬 신날 말. 시끄럽고 쓸데없는 말. 유혹하고, 속이고, 농담하고, 화내고, 다독이고, 비난하고, 변명하고, 호소하는 그런 말들을......“★
모유수유를 이유로 커피 대신 시킨 녹차라떼가 다 식을 때까지 그 문장들을 읽고 또 읽었다. 어떤 고통은 나 대신 누군가 정확하게 텍스트로 나열해주기만 해도 조금은 아물게 된다는 걸 알았다. 산후우울증이라는 다섯 글자에는 차마 다 담기지 않은 감정들을, 내 안에서 설명이 시도된 적조차 없던 감정들을 이토록 사려 깊고 섬세하게 직시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함을 느꼈다. 숱하게 반복된 무의미한 외출이 처음으로 유의미해진 순간이었다.
이제는 ‘인생 무용담 컬렉션’에 저장된 그 시간의 아픔들은 더 이상 나를 갉아먹진 못하지만, 말끔히 지워지지 않는 흐릿한 흉터로 남았다. 괜찮다. 흉터지만 흉하진 않다. 그 시간을 무사히 건너온 내 자신이 대견할 뿐이다. 일그러진 엄마의 표정을 가장 가까이서 목격하며 자란 내 아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없이 밝고 사랑스럽게 자라는 중이다. 당연히 이젠 말도 통한다. ‘시끄럽고 쓸데없는 말, 유혹하고, 속이고, 농담하고, 화내고, 다독이고, 비난하고, 변명하고, 호소하는 그런 말들을......’★ 매일매일 주고받는다. 아이가 자라는 속도에 맞춰, 내가 전시한 언어를 나 홀로 감상해야했던 고통과 천천히 작별한다. 하지만 외로움은 그렇게 한 번 지나가고 마는 것이 아니라는 걸 너무나 잘 안다. 그리고 시간이라는 주선자는 내가 지금껏 본 적 없는 새로운 얼굴의 외로움을 내게 소개시켜줄 게 분명하다. 그때가 되면 내가 또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어떻게 감당해나갈지 모르겠지만, 별 수 없다. 다만 앞으로 마주하게 될 외로움과 고독의 순간에도, 몇 년 전 그 때처럼 의지할 수 있는 문장을 만나게 되길 빌 뿐이다.◆
★김애란 – 바깥은 여름中 침묵의 미래 p.142 (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