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살 쯤인가, 우리 집 앞엔 돌계단이 있었다. 계단 위에 쪼그려 앉아 무언가 했던 것 같다. 매끄럽고 동그란 돌멩이를 찾겠다고 눈에 불을 켜고 있었든, 아무 나뭇가지나 주워 들곤 땅바닥에 낙서를 했든.. 어쨌든 그 위에서 시간을 보내던 나는 데구르르르 굴러 계단 밑으로 떨어졌는데, 제대로 떠오르는 것 하나 없는 기억 속에도 이런 생각을 했던 것만은 선명하다. '나 이대로 죽는 거구나'
이게 내가 기억하는 죽음에 가까운 첫 번째 경험이었다.
잘 잊어버리고, 모든 걸 대체로 긍정하며, 모든 걸 그런대로 이해하고, 오직 오늘만 생각하는 삶을 살다 보면 그 성격의 근원에 대해 묻는 사람이 많아진다. 가정환경 때문일까? 집안 내력일까? 풍파 없는 삶을 살아서인가? 100번 질문에 120번 정도 고민해도 답이 없었다. "원래 이렇게 태어났어요!"
지난주, 또 한 번 죽음에 가까운 경험을 했다.
내가 살고 있는 쉐어하우스에서는 종종 섭외를 받아 다큐멘터리 촬영을 하곤 하는데, 그날도 그랬다. 1시 반부터는 자연스럽게 생활하는 모습을 담고, 5시부터는 함께 식사하는 모습을 찍는다고 했다. 그럼 그 사이에 일 때문에 미뤄둔 병원을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하고 집을 나섰다. 병원까지 가는 길에 유독 날이 좋아서 사진도 열심히 찍고, 인스타그램에 셀카도 업데이트하고, 하여간 떨 수 있는 유난은 다 떨며 갔는데, 이런 것까지 유난을 떨 줄은 몰랐다.
평소와 똑같이 진료를 받고, 의사 선생님과 진료 상담을 했다. 상담이 마무리될 쯤이면 선생님은 항상 한 마디씩 덧붙였다. "유산균을 꾸준히 먹는 게 좋아요. 나갈 때 하나 구매하면 좋겠네요." 라던지, "자궁경부암 백신 아직 안 맞았으면 오늘 맞고 가는 거 어때요?" 라던지. 그날은 백신 쪽이었고, 이마저 긍정해버린 나는 어느새 왼쪽 팔을 걷어붙인 채 주사를 맞고 있었다. 간호사 선생님은 재빠르게 주사를 놓곤, 내가 알아야 할 사실 4개 정도를 노련하게 전달하며 15분으로 설정된 스톱워치를 건네주었다.
대기실에 앉아 멍하니 스톱워치를 바라봤다. 숫자가 10으로 바뀌자 느낌이 이상했다. 엄청나게 생경한데, 분명 느껴본 적 있는 그 어지러움이었다. 집 앞 돌계단에서 데구르르르 구르던 때, 엉덩이에 주사를 맞고 피를 줄줄 흘리던 때, 다래끼를 짼다고 국소마취를 했다가 정신을 잃고 쓰러지던 때... 벌떡 일어나 프론트로 향했다. 여기서 조금 더 지체되면 바로 땅바닥행이라는 걸 경험적으로 알았다. "저, 현기증이 나는데요..."
생각해보면 나에겐 죽음에 가까운 경험이 많았다.
나는 아무리 해도 미래를 떠올릴 수 없었다. 학교 다닐 때 제일 싫어했던 질문이 나중에 뭘 하고 싶냐는 거였다.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고, 그냥 하고 싶은 거 하고 싶었고, 누가 벌써부터 그런 걸 명확히 알겠냐며 위로하려 드는 사람들이 싫었다. 한 달 전 헤어진 남자친구도 그렇게 말했었다. "정말 결혼하고 싶은 거 맞아? 너랑은 미래가 그려지지 않아."
나는 아무리 해도 미래를 떠올릴 수 없다. 알러지내과에서 세 가지 마취제에 알러지가 있다고 했다. 결과지를 들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그 세 가지 약물을 검색했다. 케타민은 환각을 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어서 마약으로 종종 쓰인다는 글이 적혀있었다. 재수 없으면 마약 하다가도 뒤질 수도 있겠구나.
나는 여전히 아무 생각이 없고, 그냥 하고 싶은 걸 한다. 어차피 다 죽을 거 되는대로 살자는 게 아니라, 어차피 죽을 거라면 최선을 다해 내가 할 일을 하고 싶다. 일이 언젠가 끝난다는 건 그 순간까지 버틸 수 있는 힘이 된다. 3주만 참으면 꼭 인원 충원해주겠다는 말이, 1년만 더 기다리면 내채공 만기가 다가온다는 사실이, 내일 당장 이름도 못 외우는 무슨무슨 약물에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나를 구성하는 힘이 된다.
"우리 엄마가 나를 낳았지만, 죽음이 나를 만들었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