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믄 Sep 04. 2022

선녀방 이후

차오르는 생각을 누구한테 나눠주지 않고선 넘칠 것 같은 날들이 있다. 글로 쓰자니 원물 그 자체고, 말로 나누기엔 나를 부끄럽게 만들 것 같아 삼키는 그런 생각이 범람할 때. 나는 그런 때 선정, 아영, 신재를 찾는다. 우리가 함께 살던 2년 여는 이미 종료되었지만, 여전히 우리는 역할에 충실하다. 스무 살이 지나면 스물 하나가 아닌 스무 살 이후가 오듯, 선녀방에 살던 날들이 지나면 선녀방 이후가 온다.


선정

선정 언니와 나는 N극과 S극처럼 다르다. 실제 MBTI도 N과 S로, 우리는 우리가 서로 맞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안다. 같은 집 안에 부대끼고 살지 않았더라면 데면데면한 지인 사이도 되지 못했겠지. (내가 만나자고 해놓고 안 읽씹을 해서 언니를 화나게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언니와 내가 가장 다른 점은, 언니는 언제든 곧은 말로 상황을 바로잡을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 말은 항상 맞기 때문에 반박의 여지도 없다. 나는 내게 책임이 있는 일이 아니라면 최대한 회피한다. 같이 사는 사람이 맘에 들지 않으면 집을 버리고 도망가는 그런 류의 사람이다. 그러니 선정 언니와 내가 서로를 100% 이해하는 날은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어느 날, 불 꺼진 거실에 앉아 서로의 구남친에 대해 얘기했던 그 밤에서 새벽 사이가 오기 전까진. 우린 전혀 다른 사람이면서도 비슷한 성향의 남자들을 사랑했고, 비슷한 방식으로 이별을 맞았다. 언니가 지독한 독감에 걸렸을 때, 그리고 내가 알 수 없는 두통과 열감에 며칠 째 시달릴 때. 몇 년을 배려해주던 사람이 마지막 딱 한 번, 그렇게 이기적일 수 있다는 걸 우리는 공감했다. 공통점의 가짓수는 제일 적을지 몰라도, 그 몇 안 되는 접점은 무엇보다 깊고 소중하다. 우리는 본가에 돌아갈 때마다 저려오는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둘이니까.


아영

아영 언니가 아니라 아영'이' 언니로 불러야 한다. 언니와 내 이름엔 똑같이 동그라미가 많고, 그러니까 굳이 이응 하나를 더 붙여 우리의 연결고리를 하나 더 만들어둔다. 아영이 언니는 내가 가장 부러워하는 유형의 사람이다. LP바에서 듣고 싶은 노래를 몇 곡이나, 때론 몇 곡이든 쪽지에 적어내 신청할 수 있고, 어떤 술자리에서는 최근에 알게 된 신진 작가의 시를 낭독해줄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러닝, 클라이밍, 수영의 장점에 대해 설파하며 세상에서 제일 멋진 운동이란 말을 서슴없이 할 수 있다. 그게 노래든 음식이든 운동이든 사람이든 시든 뭐가 됐든, 아영이 언니가 너무 좋다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면 갑자기 근사하게 느껴진다. 그러니 나도 이제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확신이 넘친다. 내가 언니가 좋아하는 노래를, 시를, 장소를, 음식을, 사람을 근사하게 여기는 건 그것들이 좋아서가 아니라 언니를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언니와의 공통점은 선녀방에 살기 전보다 후에 더 많고, 차이점은 후보다 전에 더 많다. 새로 좋아하게 된 가수의 노래를 듣다 나는 문득 생각한다. 이거 아영이 언니가 좋아할 것 같아. 언니가 이 노래를 듣고 "이거 뭐야? 너무 좋잖아?" 하며 또 돌고래처럼 소리를 지르는 걸 상상하면 노래가 한결 더 근사하게 느껴진다.


신재

밤 12시가 되면 알람이 울린다. 신재 언니가 자러 가야 한다는 뜻이다. 언니는 때론 어울리지 않게 깜찍한 잠옷을, 또 어쩔 땐 중후한 스님 같은 잠옷을 입고 침대로 향한다. 나는 방에 뛰쳐들어가 자지 말라고 비명을 지르고, 프로 먹금러의 웹툰 감상 의식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다 같이 자기로 한다. 언니와 나의 대화는 그때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매일 밤 불 꺼진 방에서, 각자의 침대에 나란히 누워 사랑에 대해 얘기했다. 나는 이별 후에야 사랑을 생각하고, 언니는 연애를 시작하며 사랑을 생각한다. 결론은 단 한 번도 낸 적이 없고, 그 와중에 트와이스 노래는 빼먹지 않고 불렀다. 신재 언니는 그릇이 크다. 불편하면 피하고 도망가버리는 나와는 달리 언니는 대면하고 포용한다. 그런 언니가 사실 그러고 싶지 않았다며 불만을 토로해올 때 나는 내심 뿌듯해진다. 나에게는 짜증 나게 굴 수도, 못된 마음을 주저 없이 드러낼 수도 있다는 게 특별하다. 잠에 취한 채 생각나는 대로 던지는 솔직한 말들이, 술에 취한 채 뱉어내 기억 못 할 말들이 나에게는 특권이니까, 선녀방의 중심인 언니가 제일 작은 방을 함께 쓰는 겁쟁이라 좋았다. 나는 요즘도 사랑에 관한 책을 찾아다닌다. 사랑의 단상을, 액체 상태의 사랑을 언니에게 선물하기 위해서. 나의 이기적인 마음을 담아 언니가 여전히 사랑이 뭔지 모르길 바란다.


선정 언니의 한 달 지난 생일날, 나는 여전히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좁디좁은 딱딱한 나무 의자에 혼자 누웠다. 반쯤 몽롱한 채로 언니들을 바라보면서 이번에야 말로 밀린 편지를 청산할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같이 살지 않아도 여전히 서로가 서로를 서로의 댐으로 쓸 수 있다는 확신을 이곳에 기록해두고 싶어서. 2년 간의 생일과 크리스마스 편지를 이곳에 담아두었어.

매거진의 이전글 코리빙하우스에서의 코로나 생존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