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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믄 Oct 17. 2021

결혼을 망설인 건 너만이 아니었지만

졸업을 앞둔 막학기에도 18학점을 꽉꽉 채워 들었다. 학점이 많이 남은  아니었는데, 그냥 마지막으로 들을  있는 대학 수업일 텐데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낙원과 유토피아의 상상력'이라는 수업이었다. 매주 유토피아나 디스토피아에 관련된 책을 읽고 토론을 진행하는 형식이었는데, 원래  읽는 것도 좋아하고 토론하는 것도 좋아하니 그냥 좋아할 수밖에 없는 수업이긴 했다. 재미를 떠나  수업이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결혼에 대해 발언했던  남학우 때문이었다. 이상적인 결혼 제도에 대해 이야기하던 , 교수님이 "그럼  결혼이 하고 싶은가요?"하고 묻자 문제의  남학우가 "부모님께 효도하고 싶어서요"라고 대답했기 때문이다.


그 말이 나에겐 굉장한 충격이었다. 결혼이 효도의 범주에 들어간다고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평생에 걸쳐 넌 절대 결혼하지 말라는 말을 듣고 자랐으니, 오히려 불효면 불효였지 결혼이 출산과 양육에 대한 보답은 될 수 없었다. 정론처럼 이야기되는 '여자는 엄마의 삶을 따라간다'는 말도 한몫했다. 엄마의 책임감 있는 삶을 누구보다 존경하고, 한심한 남자를 만나 결혼하게 된 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란 걸 안다. 하지만 운명적으로 불의의 사고를 만날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하고, 그러니 태생적으로 결혼생활의 DNA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면 피하는 게 논리적으로 옳았다.


결혼을 주제로 토론한다면 전 남자친구와의 가장 큰 논쟁거리는 아이였을 거다. 난 항상 낳기 싫다, 없어도 둘이 행복하게 살면 되지 않냐, 정말 아이가 갖고 싶다면 입양해서 키우면 되지 않냐고 주장했고, 걘 무조건 같은 유전자를 가진 아이여야만 한다고 했다. 그게 어렸을 때부터 간직해온 꿈이었고, 절대로 포기 못하는 것 중 하나라고. 그런 게 꿈일 수가 있나? 결국 애는 내가 낳을 텐데, 난 그런 꿈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정말 궁금해서 도대체 왜냐고 물었다. 내가 네 아이를 낳는 게 왜 그렇게 중요하냐고. 그러자 그 앤 이렇게 말했다. "부모님께 효도하고 싶어서" 세상에, 저런 생각을 갖고 사는 사람이 또 있었다니. 그런데 그게 내 남자친구라니.


사실 그와의 결혼을 꿈꾸면서도 우린 맞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영화와 음악 취향, 가정환경, 좋아하는 음식, 삶에 대한 태도, 생활 반경, 미감, 새로운 일을 마주하는 방식, 그 밖에도 모든 것이 달랐다. 그럼에도 함께할 수 있었고, 앞으로도 함께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건 서로에게 기대한 것이 그런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저런 건 그냥 친구에게서 찾으면 되니까, 가끔 한 번씩 서로에게 맞춰주면 되는 문제니까. 세상에 단 하나뿐일지 모를 유니콘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결혼을 해야 한다는 걸 안 순간부터, 지금껏 아무 문제없었으니 앞으로도 문제없을 거라고 되뇌는 순간이 잦았다. 마음속 한켠에서는 취향과 감성이 맞지 않는 상대와 평생을 결심하는 건 불의의 사고라는 걸 알았다.


헤어지고도 한동안 서로의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보곤 했다. 그 앤 9월 3일인가 4일인가를 기점으로 날 언팔하고 더 이상 스토리를 보지 않았다. 구질구질하게 이런 것까지 기억하고 싶지 않았는데, 하필 그날이 4주년이었다. 난 여전히 그의 스토리를 구경했고, 새로운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걸 알았다. 그 여자친구와 어딜 여행 중이고, 어떤 코스였는지까지 대충 짐작이 됐다. 분노가 머리 끝까지 가득, 눈물이 눈물샘 끝까지 가득 차서 손이 부들부들 떨렸는데도 그 와중에 자기랑 똑같은 사람으로 잘 만났네 싶었다. 이번 여자친구랑은 결혼까지 하겠다고, 직감적으로 생각했다. 그 둘은 나라면 절대 가지 않았을 카페에 갔다. 나에게 거길 가자고 했으면 난 너무 싫다고 거길 왜 가냐고 했을 거고, 걘 내가 이렇게 말할 거란 걸 미리 알고 얘기조차 꺼내지 않았을 거다.


건강하고 좁은 세계, 이만큼 나의 구남친을 잘 설명하는 말도 없을 것 같다. 걔가 생각했을 때 난 쓸데없이 복잡해서 이해되지 않는 세계였겠지. 내 손에 이끌려 이주민 영화제에 갔을 때, 제사를 없애야 하느니 말아야 하느니 얘기하면서 그 앤 엄마가 요리를 잘하니까 음식을 담당하는 거라고 했다. 어머니가 왜 요리를 잘하게 되셨다고 생각하는데? 라는 물음엔 답을 듣지 못했다. 나에게 자꾸 분홍색 칫솔을 건네는 게 신경 쓰여서 얘기했을 때도, 여자 아이들에게 분홍색 장난감을 주는 게 얼마나 선택의 폭을 좁히는 일인지 설명했을 때도 별로 이해되지 않는 눈치였다. "왜 그렇게까지 생각해야 해?"라고 물었으니까.


돌이켜보면 그렇게 되었어야만 하는 일들이 있다. 당시엔 이해되지 않아도 결국엔 맞는 선택이었다는 걸 알게 되는 때가 온다. 아무리 치열하게 고민하고, 버티기 위해 울음을 토하며 노력해도 지옥은 낙원이 될 수 없다. 나는 대체로 무언가를, 혹은 어딘가를 그만두어야만 했다. 입학한 대학교에서 자퇴를 했어야만 했고, 첫 입사한 회사에서 퇴사를 했어야만 했다. 그리고 나와 다른 세계에 사는 연인과도 이별을 해야만 했다는 걸 이제는 안다.


그러니 이제는 내게 이별을 통보해준 그에게 고맙다. 바람을 피웠든, 아니면 환승을 했든, 내게 말해준 적이 없으니 진실은 모르겠고, 이유가 뭐였든 해야만 했던 일을 대신해주었다는 점에서 만큼은 고마운 마음을 갖게 됐다. 그래도 그를 향해 고맙다는 말은 죽어도 하지 않을 거다. 누구보다 행복한 연애를 하고 있으면서도 한구석에 나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을 갖고 있다면, 나의 용서를 면죄부 삼아 행복하게 두고 싶지 않다. 대신 모든 면에서 완벽한 짝을 찾아 행복하기를 바란다. 4년을 한결같은 모습으로 나를 지탱해준 데에 대한 보답으로, 그리고 널 놓치기 싫다는 욕심으로 낼 뻔한 불의의 사고를 막아준 데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온 마음을 다해 행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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