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최재천 교수의 ‘지금 우리 사회는 양심이란 단어가 사라진 사회이다’라는 말씀을 들은 뒤로 그 단어는 한동안 내 일상 속 화두가 되었다.
말하는 사람에 따라 크기도 무게도 제각각인 양심은 뭐라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렵다. 시인은 잎새에 이는 바람 한 점에도 괴로워할 정도로 예민한 양심을 가졌고 때로 부당한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 차라리 목숨을 버리는 편을 택하는 양심도 있다. 자신의 불이익을 감수하고 기꺼이 내부 고발자가 되기를 선택하는 적극 행동하는 양심이 있는가 하면 그딴 건 개나 줘버리는 게 너무나 쉬운 낯짝 두꺼운 양심도 있다.
“위기가 닥쳤을 때 왜 어떤 사람은 용감해지고 어떤 사람은 비겁해질까? 뭐가 서로 다른 행동을 하게 만드는 걸까?”
“양심이 아닐까?”
“난 간이 작아서 양심도 딱 그만할 거야. 위험하다 싶으면 현실과 잽싸게 타협을 할 거야. 어디까지나 최소한 나를 지키겠다는 거지 그렇다고 내 이익을 위해 남을 망치는 짓까지 할 수 있는 양심은 못 돼.”
불과 얼마 전 남편에게 내 양심의 크기를 고백할 때만 해도 조만간 국민 전체가 각자의 양심의 무게를 재 봐야 하는 일을 겪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12월 3일 밤 국회의사당을 보여주는 화면은 너무나도 영화의 한 장면 같아서 차마 현실이라고 믿기지가 않았다. 무장을 한 군경에 맨몸으로 맞서며 국회를 지키려는 시민들을 실시간 영상으로 지켜보면서 콩알만 한 내 양심이 부끄러워졌다. 위험으로부터 스스로를 먼저 지키겠다는 작은 욕심이 어떨 때는 개인의 이익만을 챙기다 사회 전체를 자멸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는 걸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다.
그 밤 자신의 안위를 뒤로하고 용기를 내어 국회 앞에 모여든 시민들과 목숨 걸고 국회 담을 넘은 시민의 대표들 그리고 적진인 줄 알고 도착한 곳에서 맞닥뜨린 시민들에게 무력을 행사할 수 없어 주저했던 군인들의 양심 덕분에 지금 내란이란 비상사태 중에도 조금은 덜 불안하고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한강 작가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과거가 현재와 미래를 돕고 있다고 말한다. 엄혹한 군사독재정권 시절 계엄령을 겪으며 피를 흘렸던 조상들이 없었다면 그들이 공포에 맞서 싸운 경험이 역사를 통해 대한민국 국민의 피 속에 전해 흐르지 않았다면 그 밤의 양상은 완전히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탄핵집회에서 추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색색의 응원봉 물결을 일으키는 십 대, 이십 대인 미래 세대들의 모습이 연일 뉴스에 비쳐 놀랍다. 이제 나는 과거,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빚을 진 셈이다.
24시간 뉴스를 시청하며 온갖 감정들이 들끓는다. 겁 좀 주려고 그깟 불 좀 붙여봤다는 미치광이 방화범을 체포하는데 온갖 법조문을 따져야 하다니 황당하기 그지없다. 장난으로 그랬다는 거짓말은 안에 사람들을 가둬 태워 죽이려고 방문을 걸어 잠그는 치밀한 계획에서 들통났다.
길거리에서 행인들에게 식칼을 휘두르는 정신이상자를 본다면 그 칼을 누가 나서서 뺏는 게 옳은지, 강제로 빼앗지 말고 내려놓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 아닌지, 뺏는 과정이 법적으로 정당한지 따위를 그 앞에서 한가하게 논하고 있지 않을 테다. 누구라도 할 것 없이 일단 칼부터 뺏고 본다.
법과 법이 충돌하는 동안 미치광이 방화범은 인신이 자유로운 탓에 지금 이 순간에도 2차 방화의 꿍꿍이를 숨기고 잔불을 여기저기 지르고 있다. 심지어 이제껏 자신의 충실한 호위무사였던 검찰과 사법부에 기대 끝까지 국민에 대항해 싸우겠다며 투지를 공표해 모두를 기함시켰다.
이번 일을 지켜보며 우두머리뿐만 아니라 그 범죄자가 속한 정당의 실체가, 예전부터 간파하고 그들의 해악을 주장해 왔던 사람들을 넘어서 드디어 온 국민에게 까발려졌다. 그 집단이 극단적인 사익추구의 속내를 드러냄에 있어서 포장조차 무성의하던 천박한 모습이야 그간 익숙하다지만 내란이라는 상상력을 뛰어넘는 사태를 대하는 그들의 모습은 기이하기까지 하다.
이해할 수 없는 그 당의 입장을 볼 때마다 저기는 양심을 내다 버린 자들만 모인 곳인가 여겼는데 이번에 보니 그게 아니라 거기는 원래 양심 없이 태어난 성골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던 모양이다.
인간이라면 양심이 있다. 나 같은 사람조차 콩알만 한 양심이 있단 말이다. 그렇다면 그 당은 인간이 아닌 무엇들이 모인 곳이므로 사람의 뜻을 대변하는 정당이란 호칭을 붙일 수 없다. 개인의 이익을 위해 다른 이를 해치는 선택을 서슴없이 할 수 있다면 인면수심범의 집단이라 할 수 있겠다. 왜 그런 자격 없는 자들에게 내 뜻을 대신해 한 표를 대리하게 하는가.
2022년 3월 9일에 참담한 마음으로 글을 썼다.
‘논리와 이성은 사라졌고 감정만이 막 내린 축제장에 쓰레기처럼 나뒹굴고 있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듣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내 발은 지상에서 완전히 떨어져 천상을 딛고 있다. 거기에 이르러서 위로를 받는다. 지상에서 위로받을 수 있을 거라 기대했던 가치 있는 것은 다 사라졌다......’
당시 PESD(Post Election Stress Disorder)란 신조어가 등장하고 나 또한 상처받은 마음을 삭이느라 한동안 뉴스를 보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치유될 거라 생각했는데 낫기는커녕 날마다 속수무책으로 생겨나는 또 다른 상처에 결국 온몸은 할퀸 자국으로 가득하고 상처마다 핏물이 맺혔다. 12월 3일 눈앞에서 총구를 마주하는 공포를 이겨내고 무도한 상황을 막아낸 것은 지난 3년 가까이 양심 없는 무리에게 짓눌려 상처투성이가 된 그 몸들이었다.
PESD란 단어를 유행시킨 걸로 성에 차지 않았던 사악한 무리는 이번 내란을 통해 다른 한편으로 수없이 많은 무고한 젊은이, 아들과 혹은 아버지를 범죄에 연루시켜 앞으로 오랜 시간 그들을 괴롭게할 PTSD를 떠안겼다. 국가에의 충성심이 남달랐던 그들을 범죄에 내던지고 삶을 무참히 짓밟았지만 안타깝게도 누구도 어떤 식으로도 책임을 지거나 되돌릴 수 없다. 그러므로 내란범들의 씻을 수 없는 죄는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다.
처음엔 진보와 보수가 겨루는 줄 알았다. 좀 지나서 상식의 범주가 서로 다른가 생각했다. 이제 정상과 비정상의 싸움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겠다. 그동안 비정상적인 사회에서 하루하루 자괴감과 참담함에 괴로웠던 내 몸과 영혼을 회복할 때가 되었다. 민주주의 수호와 시민의 양심회복이란 두 가치가 서로 돕고 다시 일어나 유린된 일상을 되돌려주길 바란다.
어렵게 12월 14일 서울행 차표를 구했다. 미치광이 방화범이 내지른 불이 잠들었던 이 사회의 양심에도 불을 지폈다. 나쁘기만 한 일은 없다더니 세상에, 이걸로 라도 위안을 삼아야 하나.
역사적 현장에서 우리 사회가 양심을 회복하는 순간을 직접 지켜볼 것이다. 양심 자체가 없는 성골, 양심을 내던진 진골들이 우글우글한 인면수심당과 그들의 호위무사를 자처했던 검찰과 사법 카르텔은 양심을 회복한 사회에 더 이상 함께 발붙일 수 없다는 사실을 외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