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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애니메이션처럼

by 하유미



이번 내란 사태에 대해 평소 좋아하던 인문학자인 강유정 의원이 이런 말을 했다.

‘그들은 톰과 제리를 다큐로 받아들였다. 기름에 튀겨지고 감전당하고 야구방망이에 얻어맞는 장면을 실제 행동으로 옮길 구상을 한 것이다.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그 말에 웃음기를 잃어버린 남편의 최근 모습이 떠올라 시대를 꿰뚫는 촌철살인의 논평이 송구하게도 참 사사롭게 연결됐다. 한편으로 남편의 다큐멘터리 속 주요 인물 중 한 사람인 내가 요즘 얼마나 형편없는 기분 속에 빠져있는지도 더불어 상기됐다.


사실 남편의 다큐에서 내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만 큼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다. 분명한 건 그 다큐의 팔 할 이상은 직장 생활의 고충과 토로로 점철돼 있다는 것이다. 파김치에 찐득하게 들러붙은 양념 같은 하루의 찌꺼기를 술로 씻어내고서야 쓰러져 잠드는 생활의 반복은 일하다 죽는 걸 미덕으로 여기는 현대사회에서 높은 책임감의 발로라고 추켜세워 줄 만하다.

그렇게 반전 하나 없이 똑같은 다큐를 보기 19년째, 새삼 좀 지겨워졌다.


얼마 전 남편은 새로운 현장으로 발령이 났다. 집에서 멀리 떨어져 출퇴근 시간이 길어진 데다 새 현장에서 낯선 사람들에 치이며 심적으로 육체적으로 힘든 시기에 있다.

아니나 다를까 예민한 성격의 남편은 대번에 몸 구석구석이 아프기 시작했다. 꾸준히 다니던 내과를 비롯해 여러 병원을 전전하고 있다. 혈압과 간 수치가 동시에 올라 새로운 약을 처방받았다. 목 디스크가 심해져 정형외과에서 주사를 맞고 도수치료 중이고, 입안이 헐어 구강 내과와 치과를 번갈아 다니고 있다.


여러 자잘한 질환들 따위는 다 제쳐두고 실질적으로 이 환자의 가장 심각한 원인은 스트레스이다. 정말 지독한 이 만성질병은 치료 약이 없다. 의사도 소용이 없다.

소리 없는 암살자를 남편은 매번 스스로 초대하극진히 대접한다. 자신을 튀기고 전기고문하고 후드려패길 주저하지 않는다.

애니메이션을 다큐로 만들면 일상이 호러물이 되기 마련이다. 무자비한 공격에 1차 저지선인 남편의 몸이 뚫렸다. 그나마 탄탄하다 믿었던 2차 방어선인 나의 정신 상태마저 흔들리고 있어 요즘 우리 집이 위태로운 상황에 놓였다.


주말, 시댁 식구들과 점심을 먹으로 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남편은 입 한번 열지 않았다. 우리를 식당 앞에 내려주고 남편이 주차하러 사라지자 시누이와 어머님이 득달같이 물어왔다.


“재원이 왜 그래? 화났어?”

나도 같이 따져 묻고 싶다는 말을 삼키고 피곤해서 그럴 거라고 설렁설렁 대답했다.

“그래, 그래. 피곤하면 그럴 수 있지. 우린 또 화난 줄 알고 눈치 봤네.”

난 그 눈치를 짧게는 요 몇 달, 길게는 19년째 보고 있다는 말도 꾹 참았다.

“말도 하기 싫을 정도로 피곤해서 어째.”

식사시간 내내 남편의 건강을 걱정하는 이야기가 길게 이어졌다.

누구라도 알아챌 정도로 화나 보이는 얼굴을 아침저녁으로 마주한다는 건 고슴도치도 껴안아줄 있는 고무고무 인간이 아니고서는 힘든 일이다. 그런데 남편과 연관된 사람들은 대부분 나를 말랑한 사람으로 생각한다. 그런 기대에 찬 시선이 때론, 몹시 부담스럽다.

얼마 전 우연히 예민함에 관한 영상을 보게 되었다. 하긴 가족보다 나를 잘 알고 있는 것이 휴대폰의 알고리즘이다. 손가락 관절이 아픈 것도, 비문증이 갈수록 심해지고 부쩍 잇몸이 약해진 것도 귀신같이 알아채고 약을 골라주는 효자인데, 하물며 정신 건강을 소홀히 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걸지도.


재미 삼아 예민도 테스트를 해봤는데 23개 항목 중에 20개가 해당되었다. 좀 충격이었다.
어쩐지 요즘 속으로 자꾸 뿔따구가 났다. 뿔난 감정이 불쑥 튀어 오를 때마다 두들겨 숨기기 바빴지만 두더지처럼 이 구멍에서 저 구멍으로 도망만 다닐 뿐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싸돌아다니던 뿔난 두더지가 무심코 어머님의 말을 물고 왔다.

“네가 건강해야 재원이도 돌보고 민기도 잘 키우지.”

시누이가 내 속을 읽었는지 일침을 가했다.

“어째, 너 위해서 하는 말 아닌 것 같다.”

모두가 웃음을 터뜨리는 농담에 웃음이 나지 않았다.

한날은 뿔난 두더지가 행여 놓칠 새라 남편 말도 야무지게 물어왔다.

“젠장! 아, 젠장! 상종 못할 놈들이야.”

그간 남편의 장단에 맞춰 얼굴도 모르는 특정 다수를 향해서 시원하게 쏟아붓던 욕 추임새가 내 입에서 한구절도 나오지 않았다.

잠 못 드는 밤이면 그런 기억들이 선명해져 감정이 들끓었다.
어머님의 지극한 아들 사랑은 버겁게 느껴지고 남편의 직장 험담은 지겨웠다. 내 일상의 평안이 남편의 직장 생활에 좌우되는 일이 언제까지고 반복되는 것이 원망스러웠다.
끝내 형편없는 생각을 떨쳐내지 못하는 자신이 싫어져 눈물이 찔끔 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상태의 이유가 갑자기 예민함이 높아졌기 때문이라면 예민해진 건 순전히 남편 탓이 크므로 자기혐오에 빠지기보다 화살을 상대에게 돌리자고 마음을 먹고나니 조금 위안이 된다.

솔직히 가끔이라도 인생 설정을 애니메이션 쪽으로 잡아 숨통을 틔우던 사람이 이제 완전 정통 다큐에 몰두하기로 결심한 사람처럼 굴고 있으니 평소 상대의 감정에 휘둘리기가 갈대보다 심한 사람에게 너무한 거 아니냐고.
삭막하기 짝이 없는 다큐멘터리 일상 속에서 휘청이고 있는 나날이다.

남편을 잘 아는 한의사 선생이 어제 약을 지어 보내며 말했다.

“여유로운 유미 씨가 많이 위로해 주세요.”

뿔난 두더지가 몇몇 단어를 갉아먹고 부스러기를 흘려 문장을 바꿔놓았다.

'예민한 유미 씨는 누가 위로해 주나요?'

상황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뿔난 두더지가 휘젓고 다니기를 멈추고 나면 제리가 되어 톰을 괴롭히며 깔깔 웃어줄 테다.
인생, 애니메이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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