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갑진 않지만, 나쁘지도 않네.
다른 사람에게 이 글을 보여준다고 생각만 했을 뿐이었다.
그 생각은 작은 폭군으로 변해 타자 치는 내 손가락을 투명회초리로 계속해서 때렸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책이나 미디어를 보고난 뒤 감상평을 쓰거나 그 줄거리에 관해 사색에 잠기는 것을 좋아했다. 사람들과 어울려 노는 것도 즐거웠지만 돌이켜보면 정확히 기억나는 장면은 드물었다.
영상처럼 생생한 기억들은 언제나 누군가와 깊은 철학을 얘기하거나, 나의 어두운 이면을 드러낼 때였다.
이런 내가 부끄럽다고 생각했다. 이런 걸 공유하는 건 나의 이미지에 먹칠할 뿐이야.
그런데도 글을 쓰긴 썼다. 아무도 보지 않을 내 메모장에. 세상에 나같은 사람들이 많다면... 그 사람들과는 돈과 명예와 정해진 삶에 관해서는 언급도 없이 그들이 살아왔던 삶에 대해 듣고 나의 삶도 얘기하고 싶다. 맥주 3잔은 들이켜야지---하는 음흉한 상상을 하면서.
한글자 한글자가 조심스럽다. 이 곳에 글을 쓴다는 건 내 안에 있는 무모함이 건드려져서일까?
이 강렬한 이끌림은...
대화가 잘 통했던 팀원에게 나의 독후감을 보여준 후 였다.
<슬로하이츠의 신> 한 집에 사는 스타 창작가들과 지망생들에 관한 장편소설. 1권과 2권으로 나누어져 있다.
원래 감상평같은건 잘 쓰려고 하지도 않고 자기 전에 누워 상상하며 사색을 즐기는게 다였는데, 요즘은 일부러 작가의 필체나 표현법을 분석하는 감상평을 쓰고 있다. 영화나 게임의 경우엔 연출 방식.
지금은 개발 중단된 게임의 방대한 세계관을 더, 더, 더 재밌게 전달하고 싶기 때문이다. 내 머릿속엔 어휘들보다는 음악, 사진, 그림, 또는 동영상의 형태인 정보가 훨씬 더 많다.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글 쓰는 실력이 조금 더 낫다고 생각해서 공부하는 중이다.
"OO님, 추천해주신 책 1권을 다 읽었어요."
"어땠어요?"
"...제 독후감 보실래요?"
"오, 네."
망설임없이 메모장에 있던 것을 복사+붙여넣기하여 보냈다.
짧게 썼다고 생각했는데, 메세지 크기를 보고 놀랐다. 그리고 처음 부분에는 무려 '나는 약하다'라는 표현이 들어가있었다. 누군가에게 보여주려고 쓴 글이 아니었기 때문에 더 솔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분에게는 보여주고 싶었다.
"글을 잘 쓰시네요."
"헉... 감사합니다."
"빨리 2권을 읽으셔야 될 것 같아요."
"읽고는 있었는데 이야기가 조금 루즈해져서 게임 하고 있었어요 ㅋㅋㅋ"
"잠깐 게임 끄고 끝까지 읽어보세요."
"...?"
밑도 끝도 없었지만 말을 들어야할 것 같았다. 그래서 정말 게임을 끄고, 2권을 모두 읽었다.
그리고... 이 글의 시작점에서 등장했던 폭군을 만났다.
'못 쓰면 실망할걸?'
못 쓴다는게 뭔지 말로 설명하기도 벅차다. 그냥, 나는 압박감에 사로잡혀 2권에 관한 독후감을 써냈다.
이번엔 선뜻 보여주지 못했다. 며칠을 망설였다. 그는 재촉도 안했는데 나 혼자서 끙끙 앓으며 이걸 보여줄까 말까 천 번은 고민하다가 어느 날 뜬금없이 대화 도중에 말을 꺼냈다.
"그, 2권 독후감도 썼는데 보실래요?"
"어 좋아요."
"옙..."
찰나의 망설임. 하지만 이미 질렀다. Ctrl+C, Ctrl+V. 손짓이 느렸다. 1권의 독후감보다 짧아서 침묵은 길게 가지 않았다.
"ㅋㅋㅋㅋ 저는 장르가 바뀐다고는 생각 안했는데,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른가봐요."
"그래요? 저는 그런 기분이 들었어요."
"잘 쓰시네. 글을 잘 써요."
"...크흠, 감사합니다."
"그 필사노트 산 뒤에 쓰고 있나보네요?"
"네. 매일매일 쓰고있어요."
"그런건 도움 안되는줄 알았는데..."
이 뒤는, 제 발 저려 OO님이 볼 것을 의식하고 2권 독후감을 썼다고 털어놓은 것만 기억난다. 둘 다 웃었다.
압도적인 뿌듯함이 느껴졌다.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자고 결심한지 얼마 되지 않았어서, 더 값졌다. 다른 사람에게 글을 보여주고나서 나를 자책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감탄스럽기까지! 한 단계 성장했다.
이 글을 쓰는데 그리 긴 시간이 들지 않았던 것을 보면, 어느새 작은 폭군은 내 친구가 된 것 같다.
달갑진 않지만, 나쁘지도 않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