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속에서 찾은 인생 철학
남편과 나는 수영 매니아다. 같은 취미를 가졌지만, 서로 가는 수영장도, 수영 시간도 다르고, 좋아하는 영법도 다르다. 나는 자유형과 배영밖에 못하지만 자유형을 좋아하고, 남편은 4개 영법을 다 하지만 접영을 좋아한다.
"우리 노후에는 50m 실내수영장 레인있는 해외 리조트에서 한달살이해보자."
"그래, 그 때가서 내가 자유형과 배영의 노하우를 전수해줄게."
"야야, 아무리 내가 자유형이 좀 덜나가도 니보다는 기럭지가 있는데, 내가 당연히 더 빠르지."
"내가 자유형과 배영밖에 못하지만, 왠만한 아저씨들보다는 빠르거든! 골골이지만 자유형과 배영은 내가 교과서야!"
노후 여행을 시작으로 잠시 화기애애하다 서로 자신이 수영을 더 잘한다며 신경전이 벌어졌다.
나는 허리디스크 고질병이 심해 여행을 즐겨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일년에 한 두번 서울 근교로 가는 것이 전부다. 자동차로 한 시간 거리만 이동해도 허리가 뻐근해서, 차에서 내릴 때 누군가 부축해줘야 내릴 수 있다. 아, 그러고보니 여행을 즐겨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여행'이라는 단어조차 부담스럽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겠다.
그럼에도 우리가 꿈꾸는 여행이 있으니 바로 레인 끝이 보이지 않는, 넓고도 탁트인 수영장이 있는 리조트에서 유유자적 수영하는 여행이다. 먹고 수영하고, 먹고 수영하고. 수영에만 집중하는 여행.
수영매니아 부부지만 같이 수영하러 간지는 오래되었다. 즉, 서로 자신이 수영을 더 잘한다고 뻐겨도 입증할 길이 없다. 그러기에 더욱 마음껏 입으로 수영을 뽐낼 수 있는 것일지도. ^^;;
"오늘 자유수영하는데, 옆 레인 아저씨가 자꾸 나를 도발하대. 갑자기 스퍼트를 내더니 나를 앞지르려고 하는거야. 그래서 내가 보여줬지. 파바바바바. 가볍고, 빠르게, 가뿐히 제껴주고, 나는 이 정도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뺑뺑이 몇 바퀴 더 돌았다~!"
"아니, 그 아저씨는 니 보다 키도 클텐데. 진짜 니가 더 빠르다고?"
"내가 왠만한 아저씨들 보다 더 빠.르.다.고. 진짜라고!"
"그 수영장 아저씨들 다 초급반 아니야?"
"아.니.라.고. 이번 주말에 KBS 수영장 가볼까? 거기 50m래. 수영 한판 붙어볼래?"
"........."
한 판 대결하자는 말에, 남편이 말이 없다.
"아니야. 같이 수영하지 말자. 내가 니랑 굳이 수영 빠르다고 경쟁해서 뭐하냐."
"자신없지?그치? 나한테 질 것 같지?"
".........."
자유형 대결을 피하는 남편을 다시 한번 도발해보지만, 넘어오지 않던 남편이 말한다.
"그냥, 즐겁게 하자. 굳이 경쟁했다가 누구던 마음만 상하지. 지금처럼 즐겁게 수영하면서, 니는 허리 건강 챙기고, 나는 스트레스 풀리고. 이게 좋잖아~."
지금 읽고 있는 책 <어른의 말>에서 카이스트 17대 총장인 이광형 교수님이 말한다.
사과와 바나나는
서로 경쟁할 필요가 없어요.
각자 다른 존재이니까요.
그렇다. 남편과 나는 서로 다른 사과와 바나나다. 남편은 4개 영법을 구사하는 접영 마니아이고, 나는 자유형과 배영만 하는 자유형 애호가다. 남편은 접영 웨이브의 매력에 빠졌고, 나는 물 위를 미끄러지는 자유로움을 좋아한다. 누가 더 빠른지, 누가 더 잘하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수영장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어떤 이는 평영으로 묵묵히 자신만의 리듬을 만들어가고, 어떤 이는 접영으로 역동적인 에너지를 분출한다. 저마다의 색깔로 물과 대화하고 있을 뿐이다.
이제야 깨달았다. 경쟁은 때로 앞으로 나아가게도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순간 물에 각자의 몸을 맡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고질병 허리디스크로 고생하는 사십 대(곧 오십)의 몸으로도 물속에서는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사과는 사과답게, 바나나는 바나나답게. 앞으로도 각자의 수영장에서, 각자의 방식대로 수영을 즐겨보자. 그리고 때로는 함께 꿈꾸는 그 넓은 수영장에서, 나란히 물살을 가르며 각자의 수영을 만끽하는 날이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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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보다는 #있는그대로 #서로를받아들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