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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하는 하느님 나라

by 최유나

꼭 성당의 활동 단체뿐 아니라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느꼈던 것은 그 모임에 대한 마음이 모두 다르다는 것이었다. 같은 단체에 함께 소속되어 있어도 각자가 생각하는 모임의 목적과 방향성은 각기 달랐다. 누구는 친목이 중요했고 다른 누군가는 자신의 편안함이 중요했다. 때로는 모임에서 자신의 얼굴이 드러나는 것이 중요한 사람도 있었다. 그것은 성별이나 나이와도 상관없었고 그들의 사회적 위치와도 상관없는, 각자의 특성이었다.

‘나보다 나이가 많아서’, 혹은 ‘믿을만한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서’, 아니면 ‘모두에게 친절한 사람이니까’라는 이유로 그들이 모임에서 좋은 역할을 할 것이라 믿은 나는 그들의 예상치 못한 모습에 당황했다. 모든 모임에는 추구하는 목표가 있었고, 그 목표로 향하기 위해서는 모두가 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하지만 사익을 위해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안 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은, 그들이 해야 할 일을 누군가가 더 부담해야 한다는 걸 의미했다. 나는 안타깝게도 밀리는 일을 모른 체 할 수 있는 성정(性情)이 아니었고, 아무도 하지 않는 그 일을 결국 내가 맡을 때가 많았다. 그것은 내가 속한 단체에 대한 애정이자, 혹은 단체를 만든 대표자에 대한 애정이기도 했으며 나를 돌봐주시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기도 했다.


하지만 많은 일로 이어진 시간이 길어지고, 애초부터 그 일이 모두의 일이 아닌 나만의 일인 것으로 여겨질 때 나는 지쳐 넘어졌다. 그리고 원망을 했다. 자기 한 몸 편하려고 타인의 수고로움을 외면하는 사람들, 누구의 잘못인지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에게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모임의 대표자, 그리고 이런 상황에 나를 또 빠뜨린 하느님도. 그 단체를 속 시원히 떠나거나 사람들에 대한 기대를 거두면 될 것을 나는 그 어느 것도 해내지 못했다. 그렇게 쌓여간 원망은 모임을 떠나지도, 그렇다고 모임 안에서 기쁘게 존재하지도 못하는 나에 대한 책망으로 이어졌고 그것은 내 마음의 병으로까지 제법 이어졌다. 그러한 내 모습을 여러 번 봤던 내 친구는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너는 너 자신에 대한 기대가 높은 것만큼, 타인에 대한 기대도 지나치게 높다고. 사람들은 다 다르고 이상한 사람도 많은 것이 세상이니 인간에 대한 기대를 너무 높게 잡지 말라고 말이다.


복음서를 읽다 보면 사도들의 부족한 모습이 가감 없이 드러나서 때로는 당황할 때도, 때로는 나의 모습인 것 같아 웃음을 지을 때도 있다. 새삼스레 유다를 거론할 것도 없이, 베드로 역시 인간의 한계를 잘 보여준다. 오히려 예수님에 대한 여성들의 단단한 믿음이 더 드러나는 장면에서는 사도들을 굳이 내세운 예수님의 마음이 궁금해질 때도 있다. 어쩌면 사도들도 인간의 나약함에 휘청거리곤 했으니 타인에 대한 나의 기대를 조금 거두는 것도 좋은 방법인 것 같다. 누군가는 내 모습을 바라보며 인간의 부족함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그럼에도 나는 서로가 서로를 배려와 연민으로 바라보고 도와주는 세상에 대한 꿈을 버릴 수 없다. 내가 힘들 듯, 타인도 힘들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그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줄 수 있길, 나의 이익과 안위(安慰)만큼 우리 공동체의 안위를 생각할 수 있길. 그리고 타인을 짓밟고 올라가서 거들먹거리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배려 속에서 은은히 풍기는 사려 깊음과 성숙의 향기를 모두가 더 값지게 느낄 수 있길. 그리하여 내가 소중하듯 너도 소중하며, 내가 힘들 듯 너도 힘들다는 것을 마음 깊이 느끼고 그것을 가슴에 보물처럼 품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가득한 사회가 되길. 그리하여 인간이라면, 더 나아가 생명이라면 서로가 서로를 귀하게 여길 수 있는 곳,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하느님의 나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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