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담여행4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by moonbow


빗소리가 잦아들고 있다. 그러나 그녀의 손가락은 점점 더 빠르고 거칠게 건반을 누르고 있다. 작은 공간이 피아노 소리로 넘쳐흐른다. 절정에 이르러서 그녀의 손가락은 멈춘다. 그리고 정적. 비가 다시 내리고 있다. 그녀는 항상 그녀의 몸통 깊숙이 어딘가에 있는 검고 붉은 덩어리를 느끼고 있다. 때론 너무도 무겁고 거칠어서 어떤 소리로 토해내야지만 그 열기를 감당할 수 있는. 그렇지만 어떤 소리로도 제대로 그 검고 붉은 덩어리를 토해낼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그녀는 항상 소화불량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 그는 완벽한 소리를 낼 수 있었다. 그가 입을 열면 사람들은 가슴을 열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 그것이 그의 소리의 완벽한 힘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찬양했다. 무대 위에서 그는 왕이었다. 그가 눈을 감고 소리를 내면 모든 사물이 정지한 것 같았다. 단어들이 그의 혀에서 말려들어가 빛나는 음성으로 나오고 있었다. 사람들의 박수소리가 세찬 빗소리와 같았다. 그녀는 그러니까 그 빗소리에 그저 그대로 서 있었다.

그녀의 가슴 깊은 곳에는 다른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 숨겨져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어디를 가든 그녀 자신이었다. 그녀가 손가락을 움직여 소리를 내봐도 그녀 자신이었고 건반들이 내는 주파수도 그녀 자신의 일부였다.


‘나는 다른 사람이 되고 싶어. 그와 같이 되고 싶어. 그의 소리들이 되고 싶어. 내 자신이 내는 소리가 싫어.’



그녀 자신일 수밖에 없고 또 동시에 그녀 자신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그 모순점이 언제나 그녀의 심장 옆에서 뛰고 있었다.


그녀는 건반 앞에서 소리를 낸다. 그 소리 속에서 그녀는 질식할 것 같다. 그녀의 그런 힘은 바로 그를 죽이고 싶은 마음. 그녀가 다른 소리로 도달하고 싶은 마음은 한 구석에서 완벽한 소리를 내는 그를 저격하는 마음이었다. 동경. 질투. 사랑. 또 동시에 그를 죽이고 싶은 마음. 그녀의 소리는 그러므로 그를 항상 저격하고 있었고 또 동시에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 자신의 동경이 이루어지지 않을 거라는 비참함. 자기 자신일 수밖에 없는 주파수들.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는 자신의 손가락 속에 갇힌 영혼. 참을 수 없는, 견딜 수 없는 자신의 음성, 자신의 소리. 사람은 왜 자기 자신이면서도 다른 사람이 되길 동경하는지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그녀의 음악에 ‘괜찮다’라고 대답해 주었다.


‘괜찮다.......’ 라고 그녀는 수십 번 중얼거려 보았다.


스크린샷 2017-08-23 오전 6.18.28.png 피아노 치는 여자- 르누아르



그의 목소리가 그녀의 영혼을 가득 채웠다. 증오와 사랑과 동경과 비참함이 그녀의 얼굴 가득히 그려져 있었다. 그녀의 손은 건반위에 있지 않다. 그녀는 작게 반짝이는 칼을 손에 들고 있다. 그녀가 그가 될 수 없다면, 다른 사람이 될 수 없다면, 그녀가 동경하며 또 동시에 죽이고 싶은 그를 죽일 수 없다면. 그의 노래가 절정에 치닫고 있다. 사람들은 웃고 울고 박수를 치고 있었다. 그녀의 손목에서 검고 붉은 덩어리가 음악이 되어 흐르고 있었다.



어느 날 그녀가 썼다. 또 다른 날 일기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었다.



절대 오지 않을 것 같은 미래가 현재가 되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오늘을 우리는 살고 있다.

손에 잡힐 것 같은 행복은 입김처럼 따뜻하고 또 사라져버린다.

눈을 가늘게 뜨고 먼 곳의 빛을 응시한다

밤을 지키고 싶다.

밤을 지키는 파수꾼.

적의 움직임을 기다리는 매복한 군인처럼 나는 기다린다.

나의 문장의 힘이 나약하여 나는 자꾸 허리를 굽힌다.

변비와 설사를 반복한다.

쓰고 있다는 것.

쓸 것이 많기 때문에 나에게 이 생명이 허락되었다는 것.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을 하지 못한 채 하루는 저물고

쓸모 없다는 것.

술에 취한 채 그 누구도 들어주지 않는 말을 허공에 내뱉는 늙고 초라한 남자처럼

하루는 지겹고도 쓸쓸한 뒷모습을 가지고 돌아간다.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하여 나는 서글픔을 느끼면서 나는

역겨운 어른들에 대하여 나는 이야기하면서

나도 역겨운 어른이 되어 가고 있다.

정신과 의사에게 가끔씩 말을 건넨다.

속으로.

떠나지 못하는 사람이다. 나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결혼식을 하자.

그리고 다시 돌아와서 살던 대로 사는 거야.

지루하고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처럼.

이 가난한 정신에 나는 무엇을 할텐가

도시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사랑한다면서 왜 들으려고 하지는 않는가

우는 사람에게는

왜 울어, 울지마 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먼 곳을 바라보는 것도

그 순간을 나눈 숨이 언젠가는 바람이 되어 내가

어깨를 둥글게 말고 코를 무릎에 댄 채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길 바람이라는 것을

알게 될 순간을 기다릴 때

아주 작은 모래알 같은 위로가 되어 주진 않을까

장난감 자동차가 필요한 게 아니야

나는 그저 날 진정으로 바라봐 주는 그 눈빛과 손길이 소중했던 거야

나는 고개를 비스듬하게 한 채로 차를 타고 비포장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꿀럭꿀럭. 작은 돌들을 넘어갈 때마다 차는 가늘 거리면서도 삐걱대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나는 몇몇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의 눈빛이 나를 들어 올리는 것을 보았다.

나는 소설 속에서 나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 주인공들이 대면하는 불안과 사건을 나는 겪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 개연성과 우연과 결말을 나는 온 신경을 집중하여 보곤 했다.

책을 덮고 창밖을 보았다. 꺼지지 않는 불빛이 내 눈 속으로 들어왔다. 고요하게.

나는 내 몸 안에 들끓는 많은 벌레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이 벌레들은 때로는 잠잠하다가도

때때로는 모든 신경세포를 갉아먹기도 하였고

외부의 자극에 적절히 방어막을 쳐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외부의 자극이나 외부의 병균에 우리는 하나가 되어 싸우곤 했다.

싸움이 끝난 후에는 항상 벌레들과 나는 싸웠다.

오래된 부부처럼 싸웠다.

하얀 종이를 보고 있으면 나의 잔상들이 다

찾아올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도 모르는 문장을 나는 쓰고 있다.

익히 작가들로부터 들은 바 있지만

생각한 것을 쓰지 못한다.

내 속에서 나간 활자들을 다시 눈 안에 담는다.

칙칙폭폭 칙칙폭폭

나의 숨은 크다.

만성 비염 때문인지 나는 가끔 콧소리도 내고

가끔 입을 벌리고 숨을 쉰다.

나의 숨소리가 너무도 커서 나는 당황스럽다.

두려움과 공포가 더 크다. 하지 않을 때

나는 생각한다.

어떤 미소에 담긴 감정과 생각들을.

내가 역겹게 생각하는 것들을...

나는 내가 역겹다.....

가족회의는 항상 연설로 변질된다...

연설은 세뇌로 변질된다.

세뇌는 고문으로 변질된다.

결국엔 나는 나로 살아가려고 태어난 것은 아니었어.라는 인식이 들자 나는

살아있는 것이 죄인인 사람이 되어버리고 만다...

아줌마 토크 속에서 살아남아야돼

등을 돌리면 난도질 되는 세상 속에서 말들을 나는 지워나가야 돼

나는 나로 존재하기 위하여 기다려왔어.

그러나 나는 나로써 당신에게 사랑받고 있는 것일까.

역겨워.

이 모든 것이 역겨워.

내 몸 안에 있는 이중의 불협화음이 역겨워.

신경을 갉아먹는 벌레들이 나에게 소리쳐. 그러나 들리지 않아.

너는 무엇일까.

미로 속에서 나는 너와 단 한번 마주쳤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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